송경호 연세대 박사 과정
마이클 샌델
손가락이 아닌 달을 보라
얼마 전 마이클 샌델 교수가 내한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의 강연을 보게
되었는데 엄청난 인파에 얼굴부터
찌푸려졌다. 수많은 이들이 마음 졸이며
샌델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
그의 인기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사실 그를 ‘철학자’로 보지 않는다.
다만 좋은 교수이고 뛰어난
대중 강연자일 뿐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강연이 끝난 시점에서 나는 그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마이클 샌델의 인기에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10만 부 팔린 책이 한국에서 100만부 팔리는 이유가 뭘까? 그가 하버드 대 교수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했을까? 강연장에서 관객들은 샌델을 우러러봤다. 강연이 시작하기 전부터 감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말 졸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고 열심히 강의를 들은 한 사람은 강의가 끝나자 “내 생애 최고의 강의였다”고 말했다. 글쎄, 이게 당신 생애 최고의 강의였다면 그건 당신이 지금까지 다른 강의를 이만큼 열심히 듣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강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는 대중에게 철학적 난제들을 재미있게 정리해서 퀴즈처럼 제시하고,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의견 간에 취사선택을 강요한다.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대중의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재미난 장난감 정도로 취급당하지 않는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내가 그의 강연에 가는 것을 꺼렸던 이유도 그것이 지적 허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부흥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의 강연을 직접 보길 잘했다. 이번 강연의 주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을 돈으로 사면 안 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등으로 논의는 진행됐다. 늘 그러했듯이 샌델은 “레이디 가가 혹은 무료로 진행되는 유명한 철학 강연의 암표를 사고파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일상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서 좀 더 첨예한 상황을 설정해 나감으로써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맞대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선을 그어주고 그 핵심 논리가 어떤 것인지 정리해 나갔다. 내가 감동을 받았던 건 샌델이 등장과 동시에 “오늘, 여러분은 역대 최대 규모의 철학 강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아주 의미 있는 이벤트입니다”라고 말했던 부분이었다. 강연이 진행되면서 이 말의 의미가 점차 분명해져 갔다. 샌델의 강연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연설과도 다르고 요즘 유행하는 토크 콘서트와도 달랐다. 나는 이것을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집회’라고 부르고 싶다.
샌델의 강연 방식
그 이유는 샌델의 강연 방식을 정리해보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샌델의 강연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일상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강연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화두만 던져주고 관객에게 대답을 구한다. 한 사람이 말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설사 동의하지 않더라도 참고 들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당연하다는 듯이 심의의 기본 조건인 관용과 경청이 작동하는 것이다.
한 관객이 다소 두서없는 주장을 펼치더라도 샌델이 그것을 논리 정연한 방식으로 정리해준다. 한 사람의 의견으로 부족하다면,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일종의 ‘산파술’을 경험한다. “아, 내가 하는 말이 이런 맥락과 논리로 뒷받침되는 것이었구나!” 깨닫게 된다.
샌델은 강연 중에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어느 쪽 의견에 동의하는지 손을 들라고 한다. 의견을 직접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손들었던 사람들 역시 산파술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생각보다 간접적이지 않고 직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내가 동의하는 저 사람의 의견이 구체적인 맥락과 논리를 갖추어 갈수록 나의 생각도 동시에 진척되는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서로 다른 주장들이 단순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맥락과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의견을 관용하고 경청했기 때문에 상호 의견 대립이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파악하게 되고, 비로소 토론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직·간접적인 체험은 무엇보다 “나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표명할 수 있구나”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강연에 손을 들고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관객(觀客)이 아니라 배우가 된다. 강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샌델, 심의민주주의를 부추기다
강연은 어느새 이제 입장과 논리가 정리된 민주 시민들 간의 토론이 되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때로는 박수를 치고 때로는 야유를 보낸다. 손을 드는 행위, 박수와 동의의 표명을 통해 마치 자신이 토론에서 한마디 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몰입은 강연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된다. 아니, 강연이 끝나고 샌델이 무대 뒤로 사라지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심의가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닌가?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열렬한 환호에 샌델 교수 역시 적잖은 감동을 받은 듯 보였다. 비단 극동의 조그만 나라에서 그의 인기가 엄청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강연의 마지막에 언급했듯이 “서로 다른 의견에 경청하고 진지하게 토론에 참여하는 모습에 감동을 느낀 것”이라 믿는다.
샌델은 그의 책 『왜 도덕인가?』에서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글로벌 미디어와 글로벌 시장은 저 경계선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런 힘을 지배하기 위해 또는 적어도 거기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공적 자원은 우리를 세계 속에 위치시킨다. 도덕성을 부여하는 이야기와 장소, 기억과 의미, 사건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오늘날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자원을 계발하고 민주주의의 운명이 달려 있는 시민 생활을 회복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
최장집 교수는 일찍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에서의 시민에 주목해왔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에서 “이번 촛불집회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큰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과 직결되는 구체적인 사회 경제적 정책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이다”라고 지적했다. 촛불을 들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서로 ‘심의’할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중요한 전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전환을 가능케 할 우리 사회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낸다.
마이클 샌델의 강의에서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 윤리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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