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화선지를 거침없이 가르던 손놀림은 어느새 연한 먹을 조심스레 찍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부채에 화사한 봄꽃이 피었다. 살랑살랑 부치니 더위 식힐 시원한 바람에 꽃향기가 묻어왔다. 꽃향기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불편한 일상이 조금이나마 편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가득 따라왔다.
더위가 성급히 찾아온 5월, 특별한 바람이 천안 곳곳에서 뜨거움을 식히고 있다. 숨 막히는 더위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날려 보낼 시원스런 바람은 박순래씨의 작은 부채에서 시작되었다.
“내 재능이 누군가에 도움 될 수 있다면…” =
지난달 17일 천안시 쌍용동 아비시니아 커피전문점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장애인단체 ㈔한빛회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한 기금마련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 한빛회 이연경 사무국장은 “이번 행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자립에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 관심을 갖자는 취지로 마련했다”며 “중증장애인들의 자립과 이동, 생활을 위한 행사에 많은 관심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에 박순래씨는 부채에 직접 하나하나 그림을 그리는 재능기부로 참여하고 있다. 박씨는 “신체 건강한 사람도 살기 힘든데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다”며 “내가 가진 재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니 기쁜 마음으로 함께한다”고 말했다. 부채를 판매한 수익금은 전액 중증장애인 자립생활을 위한 기금에 쓰일 예정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재능기부를 결정한 4월부터 박씨의 생활은 온통 부채로 채워졌다. 제공하기로 한 500여개의 부채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 넣다보니 늘 시간에 쫓겼다. 하지만 힘든 만큼 보람도 크다. 시간이 아까워 밥 먹는 시간도 쪼개가며 그린 부채는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200개가 판매되었다. 한국화가 남농 허 건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자연주의 화가 박순래씨의 부채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충분이 인정받고 있다.
현재 아비시니아 커피숍에서 계속되는 전시는 장소를 바꿔 6월 4일부터 쌍용동 북카페 ‘산새’에서 이어진다. 특히 24일 단오를 맞아 특별한 의미로 부채선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연락을 기다린다고. 예부터 단오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소중한, 감사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며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빛회로 연락하면 부채를 구입할 수 있다. 디자인은 전시장소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에어컨의 싸늘한 바람에 떠밀려 부채는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 여름이 와도 부채 드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 일으키려 여름을 기다리는 부채는 대형에어컨이 갖지 못한 강력한 힘을 지닌다. 멋쩍어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전할 기회를 주고 내 이웃의 불편함도 덜어줄 수 있다.
박순래씨는 “부채에는 우리 조상들의 운치와 멋이 살아 있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의미까지 더하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위는 날리고 마음은 모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부채를 위해 박씨는 다시 붓을 적셨다.
전시 및 구입 문의 : 한빛회 041-579-2752
김나영 리포터 naym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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