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지도위원인 김영구(68세)씨는 고덕동 훈장님으로 통한다. 강동구 노인일자리사업을 통해 인연을 맺은 구립고일어린이집에서 9년째 어린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있고 집 근처 초등학생들을 모아 동네 서당을 꾸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에는 1년간 가르친 6~7세 어린이 45명 중 40명이 대한검정회 한자급수자격검정시험에 응시해 준5급과 6급에 합격했다. 특히 한자 100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준5급에 4명이 응시해 전원 합격한 것은 크나큰 성과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흥미를 유발시켜서 가르쳐요. 한자자격시험도 재밌게 준비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미취학 아동들이다보니 OMR 답안지 작성법을 가르치는 것이 한자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들었지요.” 미소를 띤 채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과를 들려주는 김씨. 에너지 넘치는 노년을 보내고 있는 고덕동 훈장님이 이번 호에 만난 <내일이 만난 사람>의 주인공이다.
22년 건설맨, 한자선생님으로 변신
김씨는 건설회사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극동건설에 입사해 사우디아라비아지사에 파견 나갔고 80년대에는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로 이직해서 리비아지사 팀장, 아라크지사 팀장 등을 지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토대가 된 중동지역 건설현장에서 12년을 보낸 셈이다. 이후 직접 ‘세영주택’이라는 건설회사를 차려 운영하는 등 건설부문에서 잔뼈가 굵었다. 하지만 이 기간 틈틈이 서예와 한문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 은퇴이후 삶을 뒤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이던 50대 초반에는 위암이라는 병이 찾아와 과거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줬다. 서둘러 은퇴를 결정하고 건강을 돌보며 그동안 미뤄뒀던 좋아하는 일들을 하나씩 챙겼다. 그것들 가운데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한자 강사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어릴 적에 선비이셨던 할아버지 밑에서 붓글씨도 배우고 천자문도 배웠어요. 그런 것들이 살아오면서 취미로 자리 잡았는데 성인이 된 후에 고향인 김해에서 개최한 서예대전에 나가 특선을 할 만큼 실력이 키워졌던 것 같아요. 지금도 붓글씨 쓰기는 제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활동적인 성격의 김씨가 한자선생님으로 나선 데는 우연이 아니었던 것. 틈틈이 붓글씨를 연마해온 만큼 그의 서예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의 호를 넣어 운영 중인 ‘屹巖(흘암)서실’ 곳곳에 걸려있는 붓글씨 액자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실력파 한자선생님의 보람
한자선생님으로 나서면서 제대로 아이들을 지도하고자 그는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에서 한자교육지도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한 실력파다. 한자공인 준1급 자격도 소지하고 있다.
한자수업이 있는 날이면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머리손질도 꼼꼼히 한다는 김씨. 옷차림부터 정갈해야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도 좋아하고 선생 노릇도 확실해진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다.
“9년째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데 사자성어와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한문을 옛날이야기를 곁들여가며 함께 들려줘요. 일상과 연결시켜 한자어를 설명해주면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지요. 시중에 많은 한자 교재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적당히 재구성해서 재미있게 이끌어갑니다. 앵무새처럼 따라 읽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이 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 세월을 동네 훈장님처럼 살아오다보니 중학생, 초등학생 제자들도 꽤 많다. 길거리에서 만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 숙여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기쁜 마음을 감추기 힘들다.
김씨는 한자 실력 키우기 외에 인성교육을 염두에 두고 아이들을 만난다. 그러다보니 그와 만나는 아이들의 예절교육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오고 아이를 맡기는 부모들도 반기는 대목이다.
초등교과서에 한자 병기해야
“한자를 배우면 어휘력과 사고력이 좋아집니다. 한자교육을 원하는 학부모들이 많지만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이 실시되지 않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저를 포함해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회원들은 계속해서 한자교육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지요.”
현재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에서는 초등학교 한자교육 실시를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씨 또한 지금까지 500명가량 서명을 받았을 정도로 이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의 주장은 국어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해 자연스럽게 한자를 익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김씨는 “국어의 70% 이상이 한자가 바탕이어서 한자를 모르면 발음은 물론이고 한글 표기조차 틀리는 경우가 발생 한다”고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배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영어공부도 열심이다. “해외 근무할 때도 영어실력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요즘에는 케이블 TV에서 틈틈이 영어회화수업을 듣는 중”이라고 했다. 영어노트라 이름붙인 그의 연습장에는 직접 쓴 영어 문장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아이들에게 한문 가르치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우리 세대에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하나 둘씩 알려주다 보면 옛 것도 지킬 수 있고 옛날 조상들의 모습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명감을 갖고 임해야죠.”
고희(古稀)를 앞둔 어른이지만 노력하고 열성적인 삶을 사는 그의 모습에서 젊은 세대로서 반성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소정 리포터 bee4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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