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영어고
나의 코미디다
나는 수다쟁이다
1999년에 데뷔, 이제 14년차인데, 요즘 막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그렇게 느끼나? 피부로 못 느낀다면 거짓말일 거다. (웃음) 개그콘서트를 통해 이름을 알렸는데, 그때보다 지금 더 마음이 편하다. 그땐 뭐가 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모든 걸 다 안다는 건 아니지만, 어떤 말을 하면 말실수라는 걸 알게 됐고, 내가 잘 가고 있는지를 느낄 정도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제2의 전성기라기보다 진짜 전성기가 온 게 아닌가 싶다.
개그콘서트 창립 멤버다. 콩트도 잘하는 개그맨이었는데, 어느새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오기 시작했다. 변했다. 맞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후반에 겪어야 했던 과정이라고 본다. 나만의 통과의례? 뭐 그런 거였다. 그때는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개그콘서트)에만 안주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사람들은 “김대희나 김준호는 결국 남았잖아? 남는 게 최선일 수도 있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똑같은 것, 식상함으로부터 도피가 필요했다. 하춘화 성대모사 이상 ‘더 어떤 독한 걸 해야 할까’ 찾다가 ‘몬트리올 코미디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됐고 그때부터 변하게 됐다.
3년 전 내 모습이 그랬단다. 돌이켜 보면 정말 그랬을 것 같은데.(웃음) 녹화하다가 서있으면 강호동씨가 “김영철씨 좀 앉으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네” 하고 그냥 앉아버렸다. 그러면 앉으라고 한 강호동도 무안, 나도 무안해진다. 둘 다 편집이다. “김영철씨 시끄럽고 그만 앉으세요”라고 했을 때 “서 있을 랍니다. 허리가 아파서~” 혹은 “왜요? 앉으면 얼마 줄 건데요?” 이래야 개그가 되는 걸 이제는 알았다. 지금은 어떤 말에도 주눅 들지 않는다. 김구라가 아무리 독설을 날려도 맞받아치지 않나.(웃음)
스스로 개그의 영역을 바꿨다는 건데, 아직 ‘김영철’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표현은 ‘성대모사 잘하는 개그맨’이다. 좋은 것도 아니지만, 싫지도 않다.(웃음) 예전에는 김영철 하면 하춘화 성대모사밖에 안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영어가 치고 올라오고 있지 않나. “그 이영자 성대모사도 잘하는 애가 이번에 책 냈다며?” “영어 잘하더라.” 이제는 역전이 되고 있는 거다. 내게 있어서 성대모사는 하나의 개인기다. 김영철의 주무기. 그래서 내 성대모사는 조정린씨나 김학도씨나, 팔도모창에 나오는 어떤 분들하고는 또 다르다. 나는 해피투게더에서 나가서 “김영철씨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라는 질문에 “제가 그거슨~”하면서 이영자씨 말투로 이야기를 푸는 스타일이다. 흉내만 내고 끝이 아니라, 진짜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말하는 데 있다.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강호동 선배가 그랬다. “영철아, 니는 성대모사 잘하는, 그러니까 남 흉내도 재밌게 내는 사람 중에 하나지 성대모사가 포인트가 아니다. 니는 토커(talker)다, 결국.” 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영자 선배도, 동엽이 형도 그랬다. “너만 지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캐릭터가 될 거”라고. 나는 수다쟁이다. 나만 지치지 않으면, 영자 누나나 화정 누나랑 있었던 일, 계속 재밌게 얘기하는 그런 개그맨이 될 수 있다.
과거에 영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를 “스탠딩코미디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향후 김영철의 개그는 스탠딩코미디가 되는 건가? 아마 스탠딩코미디는 한국에서 가장 하기 힘들고, 먹히지 않는 유머 시스템일 거다. 서서 5분 동안 웃기기가 그렇게 힘들다. 남희석씨나 신동엽씨가 5분 내내 자기 얘기로 웃길 수 있을까? 한번은 웃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매주 한다고 생각해봐라. 우리나라에서 먹히지 않는 장르가 스탠딩코미디다. 그래서 그걸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수다스럽고 말하는 걸 좋아하니까.(웃음) 폭소클럽에 참여했던 경험도 있고 해서 영어 공부하면서 준비하면 될 거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김윤진씨 미국 매니저랑 통화를 했는데, 그가 그랬다. “이건 미국인도 힘들어하는 거”라고. 영어로 웃기려면 스피킹을 판타스틱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서 내게 “왜 스탠딩코미디를 고집하나. 시트콤도 있고, 영화도 있다”고 조언해줬다. 이게 마흔 세 살에 이뤄질 꿈일지 오십에 이뤄질 꿈일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길이 열리지 않겠나.
서른 살, 늦지 않았다
3권의 영어 교재를 냈다. 영어 잘하는 개그맨이란 수식어도 생겼다. 서른 살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걸로 아는데, 영어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2003년,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즈음 개그콘서트의 서수민 PD님이 ‘몬트리올 코미디 대축제’에 참가를 권하셨다. 현장에서 영어로 개그를 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 역시 영어로 외국인을 웃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영어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때 ‘English is first, Comedy is later’라고 다짐하고, 독하게 공부를 시작했다.
2003년 7월에 몬트리올을 다녀왔고, 딱 9월 1일에 시작했다. 내게 2003년 9월 1일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누구나 결심하는 2003년 1월 1일이 아니라, 9월 1일 말이다. 그래서 영어 공부하는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자주 한다. “It’s now or never.” 지금해라. 지금 아니면 절대 못한다. 그 지금을 매년 1월 1일에 맞출 필요가 없다. 가장 깨지기 쉬운 꿈이 1월 1일의 다짐이지 않나. 9월 17일도 상관없고, 4월 16일이라도 상관없으니 지금 하라고 얘기한다.
서른이란 나이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나이를 두둔하거나, 나이를 연관 짓는 건 참 어리석은 것 같다. 예전에 읽은 90세가 넘는 영감님이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할아버지께서 54세 때 뭔가를 배워보고 싶었는데, 곧 죽을 것 같아서 관뒀다고 한다. ‘환갑인데 이제 배워서 뭐해.’ 그러다 70세가 됐고, 다시 ‘해볼까?’ 싶다가도 정말 곧 죽을 것 같아서 또다시 관둬버렸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90이 넘는 나이까지 사신 거다. 그러니까 뭘 해봐야겠다고 느낀 순간부터 거의 50년을 더 사셨다는 말이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느꼈을 때 그 순간부터 배우는 게 중요한 거다. 난 그 칼럼을 보면서, ‘와! 나는 30살에 시작했으니 24년을 세이브 했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잘한 것 같다. 물론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30살에 영어를 공부하지 않고 코미디에 매달렸다면 내가 지금 강호동이 됐을지도, 김구라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당시에 영어라는 블루오션을 봤다. 덕분에 이제는 사람들이 “너는 비전이 뭐냐?”라고 물을 때, 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영어를 잘하면서 웃기는 놈’ 그게 개그맨 김영철의 비전이자 목표다.
원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였나? 동국대 호텔경영학과를 나왔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Are you ready to order?” “Could you recommend~” 정도의 기초적인 영어는 하고 있었던 것 같다.(웃음) 그리고 조금 뻔뻔함이 있어서 단어를 섞어서라도 영어를 하려고 하는 용감함은 조금 있는 정도? 유재석 선배님이 가끔씩 농담으로 “너 가만 보면 사기야. 서른 살에 시작했다고 그러지만, 대학교 때 이미 영어회화 좀 했잖아?”라고 하신다. 그런데 해봐야 얼마나 잘했겠다. 네이티브 만날 기회도 없었고, “Let‘s me introduce myself. my name is 영철 김” 달달달 외어서 하는 영어, 그 정도였다.
그때 영어에 대한 어떤 목표를 세웠는지 궁금하다. 나는 ‘Think Big’이란 표현을 너무 좋아한다. 난 토익 공부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해외여행 때 영어를 유창하게 하겠다는 목표도 아니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은 미국에 진출해 스탠딩코미디를 하는, 서양 사람들을 웃기는 거였다. 그렇게 큰 꿈을 상상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래서 난 항상 후배들에게 그렇게 얘기한다. 토익 공부를 할 거면 990점 만점을 목표로 하라고. 그래야 950점이나 935점이 나온다고. 800점 목표로 해서 절대 800점 안 나온다. 더 떨어지게 돼 있다. 항상 Think Big.
비도, 이병헌도, 보아도 미국에 갔다. 조혜련 누나는 일본에 가는 세상이 왔다. 그래서 나도 미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거다. 가는 건 어렵지 않다. 난 실패만 해도 충분하다. 내년이든 언제가 됐든, 어떤 계열사든 미국으로 오디션을 보러 가면 된다. ‘김영철, 미국 도전’ 떨어져도 상관없다. “어떻게 됐어요?” “떨어졌어요.” 그냥 그 자체가 내게는 또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이경규 선배님이 ‘복수혈전’ 망한 이야기로 아직까지 말씀하시고 있지 않나. 나도 갈 수 있다. 실패해서 돌아오더라도 말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입방정
영어 공부는 어떻게 했나?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에 출연했을 때였다. 녹화가 일주일에 수요일, 일요일, 단 이틀밖에 없었다. 월화목금 다 노는 스케줄이었던 거다. 그래서 수요일만 빠진다는 생각으로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배우나 가수들은 재충전의 시간이 있다. 드라마 끝나고 6개월, 혹은 앨범 준비하는 데 몇 달. 하지만 개그맨들은 위클리비즈니스다. 때문에 호주 어학연수 대신 국내에서 영어 학원 다니는 걸 택했다. 방송이 없는 날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 7시 30분까지 학원에 갔을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 한 10개월 정도 공부하니까 2004년쯤 귀가 뚫리기 시작했다. 2005년, 2006년은 영어에 미쳐 있었다. 방송 섭외를 거절한 적도 많았다. 그렇게 차근차근 영어 실력을 키워왔다.
2006년에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하게 됐다. 개그맨이 영어 교수로 임용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을 텐데. 연예인으로서 혜택을 많이 받은 거였다. 임용 뉴스 댓글 중에는 이런 내용이 많았다. “김영철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 많지 않나요?” 맞는 얘기다. 개그맨 김영철이다보니 더 부각 받았고, 하춘화 눈 뒤집는 거밖에 못했던 애가 영어까지 해서 더 큰 관심을 받은 거다. 물론 해외에서 8년 동안 공부하다 온 사람보다 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8년 동안 강남역에서 다리품 팔아 영어 배운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나. 어학연수나 유학 한번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영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인정받았던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번역서 ‘치즈는 어디에’까지 출간했다. 번역은 보다 전문적인 영역일 텐데. 제의를 수락하기까지 고민 많았다. 흔히 말하는 뽀록, 영어 실력이 들통날까봐 두려웠다.(웃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없었고, 대필 의혹이 나돌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에 전작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오디오북을 듣고, 영어 원서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더라. 두려움이 3이었다면, 하고 싶은 욕구는 7이었다.
책 속의 주인공 쥐 ‘맥스’는 호기심 많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캐릭터다. 스스로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다고 말했던데. 출판사에서도 맥스라는 캐릭터가 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번역을 의뢰했다고 한다.(웃음) 나와 닮긴 했다. 몇 년 전 영어책을 처음 출간했을 때 정선희 선배가 그랬다. “영철아, 고인 물에 있으면 안 돼. 늘 공부하고 움직여라”라고 말이다. 항상 그렇게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사실 영어 공부할 때를 돌이켜 봐도, 편안하게 사는 길은 많았다. 집에서 늦잠 자고, 매니저가 데리러 오면 녹화하러 가고, 다시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그러고. 하지만 난 참 잘 돌아다녔다. 아침에 택시 타고 영어 학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근처 헬스장을 갔다.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숙제를 하기도 했고, 피부과도 그 근방으로 다녔다. 강남역이 본부였던 셈이다. 최화정 누나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영철이 오빠 강남역에서 봤어요” “지난주에는 외국인이랑 얘기하고 있던데요” 라는 문자들이 자주 온다고 한다. 오죽하면 최화정 누나가 “연예인이 뭐 그렇게 싸돌아다니냐”고 하셨겠나.(웃음)
번역도 성공적으로 끝냈고, 영어의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통역도 한번 해보고 싶다. TV로 비유했을 때 번역이 녹화 방송 개념이라면, 통역은 생방송이다. 번역은 사실 넉넉한 시간도 있고, 사전만 있으면 해결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통역은 아니다. 더 많은 실력과 센스가 필요하다. 영어를 더 공부해야 될 거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입방정이다”라고 말한다. 일단 내뱉으면 수습하고, 다시 내뱉으면 수습하는 스타일이다. 그것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때문에 지금 다시 ‘미국 진출’이라는 입방정을 떨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수습하지 않겠나.(웃음)
10년 전, 대학생 때를 돌이켜 보면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 ‘더 좋은 학교를 선택했어야 하나?’ 항상 불안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태백(이십 대 태반이 백수)’ ‘이구백(이십 대 90퍼센트가 백수)’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렵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아무 데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 데나 가겠다고 하면 정말 아무 회사나 들어가게 될 거다. 불안하더라도 큰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에 쓰여 있는 말인데, 20대 대학생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지금 갈팡질팡 하고 있다면 잘되고 있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길, 움직이길, 변화하길 바랍니다,” 고민 많이 하는 20대를 보냈으면 좋겠다. 멋진 30대가 기다릴 거다.
홍승우 기자 sseung@naeil.com
사진 박경섭 STUDIO 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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