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닥꼬닥, 놀멍쉬멍’ 걷는다는 제주도 올레길을 마음먹고 꼭 걸어보고 싶었다. 세 식구가 아침 6시30분 출발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니 꼭두새벽인데도 좌석은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올레 신드롬 이후 제주도에는 성수기, 비수기가 따로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올레 스피릿을 만나다
총 21구간의 올레길 가운데 우리 가족은 제주 서남쪽 화순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산방산 옆을 지나는 올레 10코스를 선택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과 해변가를 지나니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푸른빛 바다와 아담한 삼방산이 조화로운 절경을 만날 수 있었다. 예전에 차로 쌩쌩 달리며 만났던 해안도로와는 또 다른 운치였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느리게 걷기 위해 소문대로 ‘올레꾼’들이 넘쳐났다. 나 홀로 여행객부터 가족단위, 단체로 워크샵을 온 회사원들, 중년의 친목계 모임까지 각양각색이었고 두서넛 짝지어 걷는 외국인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지난 5월에 올레 7코스를 시작으로 3개 구간을 완주했어요. 게스트하우스에 묶으며 새벽에 해돋이도 감상하고 2박3일을 혼자 걸었는데 참 인상적인 여행이었어요. 그때의 느낌이 좋아 이번에 또다시 제주를 찾게 됐어요.” 길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올레꾼 이해철씨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이정표 ‘간세’에 담긴 자연
푸른색의 올레길 이정표 ‘간세’, 돌멩이에 그린 파란 화살표와 나무에 매단 푸른색과 오렌지색 겹 리본은 길이 헷갈릴 때 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좋은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이정표 ‘간세’는 국내 한 기업의 디자인 재능기부로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얼핏 보면 두 개의 네모의자 같은데 제주의 조랑말을 단순하게 표현, 큰 네모인 ‘설명 간세’에는 장소를 설명하는 안장을 얹고 작은 네모인 ‘방향 간세’는 속을 텅 비게 두었다. 간세의 여백에 하늘, 바다, 오름 같은 자연으로 오롯이 채우라는 디자이너의 ‘깊은 뜻’이 숨어있다고 한다. 제작 과정에 얽힌 스토리를 떠올리며 길 곳곳에서 ‘간세’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14.8km의 10코스를 걷다보니 용머리 해안부근에서 국사책에서 보았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했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하멜이 타고 온 상선을 본떠 만든 모형배와 기념탑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10코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최남단의 송악산 일대였다. 산 밑자락 초지에는 몆년 전 방송되었던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 세트장이 바다를 조망하며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밭과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이 만들어 내는 풍광과 분화구 정상에서 바라본 마라도와 가파도, 쭉쭉 뻗은 소나무 숲의 은은한 향기가 멋스러웠다.
걷다보니 자연스레 이 길을 낳은 ‘올레 엄마’ 서명숙이 떠올랐다. 수십 년간 기자로 살았던 치열한 삶을 정리하고 떠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올레길. ‘길을 걷는 다는 것과 길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 절감하며 ‘퇴역기자’는 주위의 질시와 오해, 행정관청의 오만과 편견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343km의 길을 냈다. 그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선보인 올레길에 지금은 매월 6만 명이 찾는다. 순수한 열정과 강인한 실천력을 지닌 ‘그 여자의 힘’이 올레길과 오버랩되었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평소 운동 부족인 초등학교 5학년생의 ‘저질 체력’이 걱정되었지만 남편과 함께 어르고 달래가며 산행 길에 올랐다. 성판악을 시작으로 진달래밭을 지나 백록담까지 5시간여를 걸었다. 산 밑자락의 운치 있는 단풍숲을 지나 정상 부근에 가까이 갈수록 이파리 하나 없이 하얀 줄기를 드러내며 죽어서도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는 고사목 숲과 눈 아래 펼쳐지는 구름의 조화가 근사했다. 백록담을 ‘찍고’ 하산길에 문제가 터졌다. 딸의 체력이 바닥 나 더는 못 걷겠다며 울먹이며 주저앉아 버렸다. 막막해 할 즈음 한라산 국립공원 직원이 구세주처럼 등장, “산 속이라 금방 깜깜해져요. 아이는 도르레에 태워 내려줄테니 어른들은 얼른 산을 내려가세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등산로를 따라 설치된 짐 싣는 레일 도르레에 딸을 태워주었다. 한라산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올레꾼이 즐겨 찾는 ‘동문시장’
올레길이 뜨면서 덩달아 인기를 얻고 있는 곳이 전통시장이다. 제주공항에서 10분 거리인 동문시장은 근처에 올레길과 가까워 올레꾼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싱싱한 은갈치와 옥돔을 푸짐하게 늘어놓은 좌판과 귤,한라봉,황금향을 파는 특산품 코너, 할머니 노점상이 즐비한 재래시장이 한데 몰려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이 이곳의 매력이었고 운반하기 쉽도록 박스 포장과 택배 서비스가 체계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어 쇼핑하기 편했다.
‘올레 스피릿’을 맛보기 위해 제주 구석구석을 걸어본 이번 여행은 많이 고단했지만 오랫동안 기억될 가족여행이 될 것 같았다.
올레꾼이 꼽은 베스트길
․7코스 (16.4km, 4~5시간 소요)
서흥동 외돌개에서 시작해 서귀포시 월평마을에서 끝나는 길. 올레꾼들이 가장 아끼는 자연생태길인 ‘수봉로’를 만날 수 있다. 일강정 바당올레는 검은 돌이 융단처럼 깔인 아름다운 길이다. 곳곳에 서있는 돌조각들 덕택에 돌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10코스 (14.8km, 4~5시간 소요)
화순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산방산 옆을 지나 송악길을 넘어 모슬포항까지 이어진다. 국토 최남단 송악산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근처에 <대장금> <인생은 아름다워> 드라마 촬영지가 있다.
오미정 리포터 jour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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