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읽는 인문학강의(9)
‘자유’에 대하여
최준영
前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교수, <유쾌한 420자 인문학> 저자
7년 전 국내 최초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과정(성프란시스대학)에 참여해 강의했다. 노숙인인문학을 하다보면 우리가 아는 보편적인 주제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과 시각을 접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유’에 논의다. 일반의 상식과는 많이 다른 노숙인들의 ‘자유’에 대한 의견을 소개해 본다.
할리우드 영화 <행복을 찾아서>를 보면 집세가 밀려 주거를 잃은 주인공과 그의 어린 아들이 노숙인 쉼터 앞에 줄을 선 뒤 잠자리를 배정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마져도 얻지 못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전깃불이 나간 쉼터에서 밤늦게 창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해 시험공부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현대판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해야 할까. 그렇게 노력한 끝에 주인공은 마침내 증권회사의 정식직원이 되어 노숙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노숙인들과 함께 그 영화를 감상한 뒤 토론에 붙여본 바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숙인들은 영화에서 별반 감동을 받지 않은 눈치였다. 요는 미국의 노숙인 쉼터와 우리나라의 그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거였다. 차라리 거리에서 풍찬노숙을 할망정 쉼터에 입소하지 않겠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 거다.
노숙인 쉼터엔 ‘자유’가 없다는 거다. 그래, 대체 자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자유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노숙인 쉼터는 통제와 감시를 통해 그걸 못하게 하니 자유가 없는 거지요.”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을 통해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폈던 바 있다. 밀의 자유론은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천부적 권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개인의 개별성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춘 자유를 논하고 있다. 그로부터 시민의 참정권을 신장시키고, 사회구성원 전체를 행복하기 위한 자유권의 신장을 주장한 것이다.
노숙인이 말하는 자유는 밀의 그것과는 다르다. 외려 더 현실적이며 현대적 개념의 자유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은 노숙인의 쉼터에 들어가지 않을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웃고 비난할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로서 시민적 권리 즉, 경제적, 사회정치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에서다.
최근 역사교과서에 수록된 용어를 두고 논란이 일었는데, 키워드는 ‘자유’였다. 보수진영에서 새삼 민주주의 앞에 자유라는 용어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건데, 내 보기엔 난센스에 가깝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 개념이다. 거기에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진 수식어를 넣는 것은 민주주의를 훼손할 개연성이 있다. 더구나 ‘자유’라면 더욱 그렇다.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 역시 독립적으로 - 혹은, 자유롭게 - 개념적 완결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는 상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보적인 관계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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