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고등학교의 조건

지역내일 2011-10-25


 강현석
 우리들학교 대표 교사
 031-912-1237

 매학기 수강 신청을 통해 스스로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서 듣는 우리 학교. 새 학기에 접어들던 8월 어느 날, 저는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새로 온 아이의 수강 신청서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철학 연습> 강의는 들어두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텐데, 왜 신청하지 않았지?”
“그게 그러니까요, 사실은… 철학이 뭔지 몰라요!”
 ‘무지의 자각이 곧 앎의 시작’이라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현실에서 ‘무지의 자각’은 이처럼 ‘무관심의 시작’일 뿐입니다. ‘모르니까 알려고 해야지’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과 약간의 용의주도한(?) 설득으로 지금 그 아이는 그 수업을 잘 듣고 있지만….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분기탱천하는 대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애는 모르는 게 있어도 알려고 하지 않아요.’ ‘목표 의식이 없어요.’ ‘뭘 해도 작심삼일이에요.’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버전은 다양하나 내용은 한결 같습니다.
 교양은 물론 입시교육까지 다부지게 시키는, 대안학교로서는 별난 학교에 있다 보니, 몸이 단 학부모들에게서 같은 내용의 애타는 호소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요?’ ‘아버님은 안 그러세요?’라고 반문하고 싶은 위험스런 욕망을 억누르곤 합니다. 도저히 힘들 때는 시제를 살짝 바꿔서 표현하죠. “어머님은 안 그러‘셨어’요?” “아버님도 그맘때는 그러‘셨을’ 텐데요.”라고.
모르는 것에 무관심하고(혹은 무관심한 척하고) 낯선 것을 기피하고 재미없는 일을 싫어하는 건 애나 어른이나(?) 똑같습니다. 주관이 많이 개입된 판단입니다만, 인간이 가진 의지력은 극한 상황을 뺀 삶의 대부분에서 나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생 살아보니 별 것 없더라. 아들아, 너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라고 쿨한 척하기도 불안합니다. 오늘 하고 싶은 걸 한다고 내일도 할 수 있다는 보장은커녕, 그럴 수 없을 확률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그래도 고등학생인데!). 압도적인 불안을 이겨내고 쿨한 선택을 용맹스레 실천하더라도 또 한 번 거대한 벽에 부딪힙니다. “그런데 엄마, 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딜레마의 탈출구는 행복의 정의에 있지 않을까요? 한쪽에서는 ‘입시성공이라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한다’며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다른 쪽에서는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면서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추궁하거나, 책임을 전가합니다. 선택은 반대이나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이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은 같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현재의 행복입니다. 과거는 기억으로서 미래는 기대로서 의미가 있을 뿐 인간의 삶은 언제나 현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유행했던 노래가사에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에 깃들여 있습니다. 단, ‘인생만사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공자왈 맹자왈 식의 허튼 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한 마디를 추가해야 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에 있다고.
그런 행복은 쉽지 않습니다.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아이의 손끝이나 홈런 타자를 꿈꾸는 아이의 손바닥에 잡힌 물집처럼 그 과정은 오히려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행복한 고통입니다. 아이가 충분한 여유를 갖고, 어른들의 세심한 도움을 받아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성장의 힘을 자신의 내면에서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고등학교’라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뜨거운 얼음’이란 표현처럼 ‘형용모순’입니다. 행복한 학교는 은연중에 ‘공부를 덜 시키는 학교’로, 웃음 띤 얼굴의 고3은 ‘만사태평인 수험생’으로 여겨지지요.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 자신의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에 있고, 내면을 채워가는 과정이 공부라면, 행복한 고등학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수험생이라면 힘든 가운데 얼마든지 웃을 수 있을 겁니다.
 멘토로서 한 인간으로서 부족함을 알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미래의 꿈을 위해 스스로 부족함을 일깨워 채워나가는 학생들이 만나는 곳. 우리가 가꾸어 가는 행복한 고등학교의 모습입니다.
 한 아이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미래의 행복보다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여러 대안학교를 거친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불안했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입학 면담은 길게 이어졌고, 선생님들은 아이의 내면을 읽어내는 데 힘겨워했습니다. 그러다 아이의 낮게 떨리는 한 마디가 선생님들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요….”
 오늘 그 아이와 수업에서 만났습니다. 누구보다 우직하게 공부해왔지만 아직은 자신 없어 하는 영어 과목입니다. 저의 질문이 있었고 공부깨나 한다는 녀석들도 헛다리를 짚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고 아이가 손을 들기도 전에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답할 수 있지?” “음, 네….”
 대답은 완벽했고, 다른 아이들은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으며, 아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 순간 저는 행복했습니다. 아마 그 아이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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