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화는 세상 바라보는 작은 창
‘작가의 말’에 그는 늘 ‘일산 흰돌마을에서 노경실’이라고 쓴다. 많은 문화예술인이 깃들어 사는 곳이지만, 자신이 사는 동네를 이처럼 정겹게 불러주는 작가는 흔치 않다. 걷고 쓰고 음악 듣고 또 글을 쓰는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노경실 작가. “무조건 아이들 마음으로 동화를 쓴다”는 그를 만났다.
넷째 동생이 이끌어 준 작가의 길
1974년, 급성폐렴을 앓던 넷째 동생이 그의 품에 안겨 숨졌다. 열일곱 소녀에게 동생의 죽음은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그 역시 폐렴을 앓고 있었기에 아픔이 더했다. 동생을 따라 죽겠노라고 자살 기도도 여러 번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힘겹게 보낸 그는 퀴리부인처럼 과학자가 되려던 꿈을 접고 작가가 되기로 했다.
이북에서 혈혈단신 내려와 가정을 꾸린 아버지 아래서 오남매의 맏이로 성장한 어린 시절, 돌아보면 작가로서 주어진 길이 아니었나 싶다. 밤마다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동생들에게 해주던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 지금 쓰는 동화의 모태가 되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막내 동생은 세상에서 여덟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큰언니’를 작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1982년 중앙일보에 「누나의 까만 십자가」 당선,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오목렌즈」가 당선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책들은 폴란드, 일본, 중국, 대만 등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고 있다.
“어떤 날은 자다가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이런 나를 작가로 만들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해요.”
현실의 아이들 생생하게 살아있는 동화
『상계동아이들』은 상계동에 직접 살면서 쓴 글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한편의 다큐에 가까운, 서민층 어린이들의 삶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복실이네 가족사진』은 작가의 자전적 동화로 굴곡 많은 현대사 속에 살아온 여섯 식구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은 시골학교에서 형제처럼 자라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심학산 아이들』은 파주의 심학산자락 아래에 있는 학교를 배경으로 삼았다. 해마다 한차례씩 문학기행을 할 만큼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작품마다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민낯으로 등장한다. 동화니까 ‘천사 같은 아이들’이 등장할거라 생각하면 깜짝 놀랄지 모른다.
최근 작가는 청소년 소설에도 눈길을 돌린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캐릭터가 되어 준 조카들이 자라서 청소년이 된 것도 큰 이유다.
『열네 살이 어때서?』는 첫 성장소설로, 사춘기 아이들의 아픔과 사랑, 이별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열일곱, 울지 마!』는 10대 미혼모의 현실을 그려 청소년들의 성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한다.
“9살이 주인공이면 완전히 9살의 영혼으로 쓰려고 해요. 14살이면 14살이 되죠.”
섣부른 동정이나 가르침 대신 작가는 자기 안의 어린이를 깨운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 아이들은 기어이 희망을 찾아낸다. 그것이 노경실 작가의 글이 주는 힘이다.
동화로 아이들의 손을 잡다
신도시의 모습을 갖추어가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일산은 그에게 ‘참 좋은 곳’이다. 상계동 아이들을 쓰면서 받은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으로 흰돌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문화예술인이 많이 살고 있으니 어디를 가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외롭지 않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에게 호수공원은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작업실은 호수공원과 라페스타 사이에 있는 오피스텔이다. 6시까지 일을 하고 나면 집으로 가서 오페라 실황 디브이디를 켜놓고 글을 쓴다. 그러다 문득 일어나 산책을 하고 책을 읽는다. 신학부터 과학, 만화까지 가리지 않는다.
혼자만의 작업에만 힘을 쏟지는 않는다.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과 국립도서관 소리책나눔터 부이사장으로 일하며 동화를 둘러싼 어린이들의 현실에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시각장애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점자 창작동화가 적은 것을 알고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날 때면 “한 해에 한 권씩 점자로 창작동화책을 펴내 달라”고 당부한다.
그가 건네 준 점자책을 만져본다. 울퉁불퉁한 표시는 앞을 보는 이가 해석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언어다. 저 너머 세상의 물을 길어 이 세상 사람을 살린 바리공주처럼, 작가는 오늘도 아이들 마음이 사는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