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농사의 달인 홍영표(78)씨는 서울시 최고령 농부다. 스무 살 무렵에 부모님을 도우면서 농사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60년이 다 돼간다. 오랜 세월 동안 씨를 뿌리며 땅에 기대어 살아왔다. 농부의 삶은 고달픈 육체노동자로 보이기도 하고 웰빙생활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한평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 채소는 가락시장에서 가장 비싸
홍씨는 수서역 근처에 땅 8300제곱미터(2천500평)를 빌려 농사를 짓는다. 주말농장 10평 농사를 지어본 깜냥으로는 이 땅이 얼마만큼 큰지, 일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잘 안 된다. 더구나 비닐하우스는 사철재배여서 농한기가 없지 않은가. 흰머리가 내려앉은 아들 성원씨와 함께 짓는다고는 하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만만치 않은 노동일 터이다. 놀라운 건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500제곱미터(5천평)를 농사지었다는 사실이다. 주인이 땅을 내달라고 해 경작지가 반으로 줄었단다.
홍씨는 상추와 근대와 참나물을 기른다. 인터뷰 장소인 창고 앞 비닐하우스를 보니 한 동 전체가 참나물 밭이다. 참나물은 한 번 심으면 다음엔 씨를 안 뿌려도 연속 수확이 가능하다. 베어서 팔면 그 자리에서 계속 올라오기 때문이다. 상추와 근대는 뽑아서 판 다음 바로 모종을 심는다. 항상 모종을 기르고 있으므로 옮겨심기만 하면 된다.
그는 생산물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가락시장에서 우리 물건을 제일 쳐줘요. 생산자(홍영표?홍성원)이름만 보고 바로 사갑니다." 베테랑 솜씨로 길러낸 데다 깨끗하게 손질해 내기 때문이란다.
농약도 거의 쓰지 않는다. "70년대엔 소독도 참 많이 했어요. 오이를 소독한 날 따서 장에 내다 팔기도 했고요. 지금은 그렇게 하면 큰일 납니다." 모종 때 농약 한 번 치는 게 전부다. 그 뒤 수확할 때까지 소독하지 않는다. 적어도 거두기 2주일 전까지는 소독을 마쳐야 한다. 요즘은 잔류농약 검사가 철저해서 적발되면 일시적으로 판매가 중지돼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막대한 보상비 사기꾼에게 날려
홍씨는 경기도 광주군 남정면 분원리가 고향이다. 400호 정도가 분원리 벌판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거기서 벼농사를 짓고 비닐하우스에 상추나 근대도 키웠다. 농가 대표로 중매인이 되어 장사꾼이 농산물을 사러 오면 흥정을 맡기도 했다. 30대 초반 무렵 그의 인생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팔당댐 공사로 고향이 수몰됐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을 잃기는 했지만 꽤 많은 보상비를 받았다. 그 돈을 성남의 개발지역에 모두 투자했다. 삼촌이 복덕방을 했기에 믿고 맡겼다. 얼마 가지 않아 값이 몇 배로 올랐다. "그 때 팔았어야 했어. 그게 잘 됐으면 여기 와서 농사지을 일도 없었지…" 그러나 삼촌이 사기꾼에게 당했다. 무일푼이 된 그는 수서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노지재배만 하던 땅에 처음으로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오랫동안 동네의 작업반장과 작목회장을 맡아 농사에 필요한 물품들을 싼값으로 공동구매하고 농산물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공동판매를 추진했다. 65세 때는 4년 임기의 송파 농협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농사꾼 된 거 후회한 적 없어
열심히 살았지만 농지 임차료는 비싸고 농산물 값은 쌌다. 3남 1녀를 가르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그에게는 농사 말고도 한 가지 재능이 더 있었다. 중개인 역할이었다. 분원리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장사꾼을 따라나섰다. 그가 나서면 흥정이 잘 됐다. 하루만 일하면 쌀 몇 가마니 값을 벌어들였다. 당시 하루 품값이 좁쌀 한 되였던 시절이었다. "농사짓는 틈틈이 나가서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아이들 학교도 보냈지요. 그 애들 결혼 할 때 집도 한 채 씩 사주고."
아예 장사로 나섰으면 큰 상인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거간은 말로만 하는 일이지만 장사는 달라요." 돈을 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런 사업은 밑질 수도 있고 하루아침에 망할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땅 농사는 망할 일은 없어요. 밑질 염려도 없고. 적어도 뿌린 만큼은 나옵니다. 시시하게 딴 거 하느니 이거 하는 게 안전해요." 땅에 대한 그의 믿음은 확고했다. "농사꾼 된 거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농사 권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 땅이 있으면 해볼 만하다"고 홍씨가 답했다.
출하를 앞둔 상추가 자라는 하우스로 가는 홍씨, 손톱 밑에 낀 흙때가 훈장처럼 보였다.
사진 김태헌 작가(스튜디오 세가)
신운영 리포터 suns16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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