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으로 어떤 것을 ‘정의’(‘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정의보다는 어떤 것의 ‘관계’(사이 혹은 상호작용을 고찰하는 것)를 규명하는 걸 더 신뢰한다.
김용준 교수의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를 신뢰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섣불리 어떤 것을 ‘정의(What is~?)’하는 것보다는 어떤 것들의 ‘사이’(inter~)''를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학구적이다.
신영복의 ‘관계론’이 그러하며, 해석학의 거두 가다머 역시 “어떤 것을 정의하는 순간 축소`왜곡의 혐의를 벗기 힘들며, 그 어떤 정의도 실체적 진실을 전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의미를 새롭게 음미하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는 신뢰할 만한 저작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은 생명의 의미에 대해 너무나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생명이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다.”
이 단순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50쪽을 흐트러짐 없이 숙독해야만 한다. 그렇기로 미리 겁부터 먹지는 마시라. 저자는 과학자치고는 비교적 친절하며,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섬세한 문학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니까.
각설하고, 1953년 <네이처>에 겨우 천 단어(한 쪽 정도)의 짧은 논문이 실린다. ‘DNA의 이중나선’에 관한 이 논문의 두 저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클릭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담담하게 말한다.
“이 대칭 구조가 바로 자기 복제 기구를 시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 마지막 부분의 “~~ 우리가 모르는 게 아니다.”라는 모호한 표현은 이전의 숱한 과학자들의 수고와 성취를 함부로 전유하거나 도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내포된 겸양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일테면 이런 것들이다.
‘DNA = 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한 오즈월드 에이버리, 샤가프의 퍼즐, 그보다 앞서 ‘동적인 평형상태’에 대해 최초로 밝힌 루돌프 쉰하이머와 역작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생명에 대한 총체적 화두를 던졌던 슈뢰딩거, 무엇보다 X선 해독의 과정에서 최초로 이중 나선구조를 발견했지만 끝내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로잘린드 프랭클린, 그녀의 발견을 알면서도 끝내 침묵한 대가로 왓슨, 클릭과 함께 노벨상을 받게 되는 윌킨스까지...
다시 생명이란, 끝없는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등 자기복제와 활동(브라운 운동)을 통해 활력과 에너지를 생산하여 마침내 최대의 엔트로피에 다다라 죽게 될 운명이지만, 다행이 체내의 조직적 상호작용을 통해 ''동적평형''을 유지하며 생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좀더 체계적인 정리가 바로 다음의 진술이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동적인 평형은 그 스스로 매 순간순간 위태로울 정도로 균형을 맞추면서 시간 축을 일방통행하고 있다. 이것이 동적인 평형의 위업이다. 이는 절대로 역주행이 불가능하며, 동시에 어느 순간이든 이미 완성된 시스템이다. (중략) 자연의 흐름 앞에 무릎 꿇는 것 외에, 그리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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