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시작돼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엄마들의 한숨도 깊다. 평소에 자녀와 소통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을 경우 사사건건 부딪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커갈수록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아이, 내성적인 아이, 사춘기 반항이 심한 아이 등 아이들마다 성향도 다양해 부모들이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과의 소통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학부모들이 나름대로 터득한 ''내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사례별로 소개해본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아들, 바로 부딪치지 않는 것이 최선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욱하는 모습을 보인다. 며칠 전에도 친구들과 잠깐 농구를 하고 온다더니 학원에 갈 시간이 다 돼서야 들어온 적이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또 지각하겠네. 너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라며 잔소리를 했더니 갑자기 방문을 쾅 닫으며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예전 같았으면 나도 바로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어디서 버릇없이 구느냐"라며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제 분에 못 이겨 더 심하게 씩씩대며 나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을 테고.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 시작된 때늦은 사춘기는 아들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버럭 내기 일쑤였고 그런 태도를 나무라면 더 폭발했다. 처음에는 책상을 치고 난리더니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지켜보는 내가 겁이 더럭 날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의 마음을 살피는 건 둘째 치고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식으로 같이 흥분했다. 그러다보니 소통은커녕 사이만 점점 더 악화 될 수밖에.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부모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해볼 것을 권했다. 강의를 통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부족한 부모였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나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였던 아들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춘기 자녀가 감정을 폭발시킬 때에는 같이 흥분하지 말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훈육법을 실천한 것이 그 비결이었다.
아들이 사소한 일로 돌변할 때마다 바로 나무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일단 그 자리를 피했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달라진 내 모습이 어색했던지, 아니면 스스로도 너무했다 싶었던 건지 어느 날 아들이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 엄마"하면서 다가왔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만 서러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 날 아들과 나는 서로의 힘든 점을 터놓고 얘기할 기회를 처음으로 가졌고 함께 노력하자는 약속을 했다.
이렇게 서로 소통하게 되면서 그동안 꽉 막혀있었던 사이가 시원하게 뚫렸다. 비록 아들은 여전히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보다 빨리 극복을 하는 편이다. 게다가 마음이 풀리고 나면 자신이 왜 힘든지에 대해 터놓기도 하니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부모교육을 통해 아들과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셈이다.
딸의 꿈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소통
우리 딸은 사회성이 좋아 친구도 많고 항상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외향적일 것 같은 딸이 정작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고, 속내를 쉽게 털어 놓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중학생이 되고서야 알았다.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워 내심 든든해하기만 하고 정작 아이의 속마음은 읽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과 함께 경쟁적으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당연히 목표는 외고 진학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건 단지 엄마와 주변 사람들의 목표일뿐이었다. 2학년이 되면서 영어학원 평가서에는 토론수업의 참여도가 낮다는 지적이 나왔고 학교성적도 정체 상태가 계속됐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몰라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왜 더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딸을 다그쳤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일방적인 훈계만 계속될 뿐 아이는 마음을 열지 않고 울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어렵게 꺼낸 얘기는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며 한 번도 외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조기유학 덕분에 영어를 잘했고 성적도 상위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외고 진학으로 방향이 잡혔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 속에 아이 스스로의 희망사항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이가 그동안 말은 못하고 얼마나 답답했을지, 나야말로 못난 부모의 전형인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비록 이 일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아이와 소통하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먼저 엄마에게 속 얘기를 해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딸을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유난히 책을 많이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으니 적성에 꼭 맞는 꿈이라며 아이를 인정해주었다. 더불어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 마음을 몰라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으로 살면서 항상 말로 표현해야 남이 알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딸은 그동안 자신의 꿈을 얘기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 같아 속만 태웠는데 엄마가 의외로 쉽게 받아주자 용기를 얻은 듯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수시로 소통하는 둘도 없는 모녀 사이가 됐다. 일반고에 진학한 딸은 엄마에게 공부 스트레스를 하소연하면서 풀고 엄마는 친구 같은 딸에게 의지하면서 산다.
절절한 마음 담아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대학생인 아들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강남의 한 영어학원에서 토플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왈칵 눈물이 솟는다.
결혼 4년 만에 우리 부부는 어렵게 아들하나를 낳았다. 나는 아이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며 애지중지 키웠다. 아들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로 학교의 각종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물질과 몸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은 머리가 좋은데다 집중력까지 뛰어나 중학생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학년 기말고사에서는 전교 1등을 했고, 3학년 때에는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부러움과 축하를 받으며 나 역시 기고만장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동안 특목고 준비를 꾸준히 해왔던 아들은 어디든지 한 군데쯤은 무난히 합격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여러 번의 좌절을 겪으면서 아이는 많이 낙심했고, 일반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이 싫다며 아예 공부를 손에서 놔버렸다.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심지어는 시험기간 중인데도 이불을 둘러쓰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내신에 비상이 걸렸다. 아들은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선포했다. 울며불며 매달려 보기도 했지만 막무가내인 아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겨우 자퇴는 만류했지만 힘겨운 아들과의 사투가 그 후 2년이나 지속됐다.
학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수업일수가 모자라 졸업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시험이나 공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제발 출석만 해달라고 애원했다. 겨우 달래서 전문기관에 가 상담을 받아보니 강박증과 자폐증세 등이 보인다는 것. 이 시점에서 우리 부부가 해야 할 일은 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 아이의 심정이나 상황을 전적으로 이해해주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들에게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냉담하던 아들이 일주일쯤 지나자 관심을 보였고, 한 달 후에 답장을 보내왔다.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고자 노력했지만 너무 힘들었다. 전교 1등을 놓칠까봐 밤새 악몽에 시달렸고, 평소에도 그런 부담감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게다가 리더십도 없는 내가 학생회장까지 맡게 되니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공부도 할 것이고 대학에도 갈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가슴 아픈 아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결국엔 우리 부부의 지나친 욕심과 교만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삼수를 한 끝에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요즘도 가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에게 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또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어줘 고맙다는 절절한 내용을 담아서 말이다.
화가 날 땐 뒤로 한 발 물러서기
나는 이제껏 큰 소리 안내고 두 아들을 키워왔다. 그건 아이들이 순한 덕분이기도 하고 나의 중학교 교사 경험 덕분이기도 했다. 경험에 의하면 거칠고 우악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도 속은 단순하고 여렸다. 진정어린 말로 다독거리면 대부분 이야기가 통했다. 아들 둘을 키울 때도 그런 식으로 소통했다.
큰 아이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엄마 몰래 PC방을 간일이나 작은 아이가 인터넷 강의 시간에 게임을 한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속으로는 충격이 컸다. 하지만 큰 소리로 야단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화가 가라앉을 동안 그 일을 모른 척 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꺼낼 적당한 시간을 골랐다.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서 막 돌아온 시간, 식사하는 시간, 모처럼 쉬는 시간은 피했다. 내가 선택한 시간은 잠자기 직전이었다.
대화는 아이의 하루생활을 좀 과장해서 칭찬해 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다음 가벼운 이야기처럼 용건을 이야기하고 잠들기 전에 잠시만 생각해보라는 당부로 마무리를 했다. 그러면 이웃들은 묻는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나는 해결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한 것뿐이다. 해결은 당사자인 아이가 해야 될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대학생이 된 큰 아이와 다시 마찰이 생겼다. 보상폰으로 휴대폰을 구입한 아이는 다 쓴 휴대폰을 대리점에 반납하게 됐다. 그래서 반납하기 전에 폰에 들어있는 정보를 모두 삭제하라고 하니 아이가 그럴 필요 없다고 우기는 것이다. "정보 유출이 심각한 세상이다. 그 속에 친구들 전화번호가 300개는 들어있지 않냐"고 했더니 아이는 "엄마도 참~ 내 정보를 어디에 써먹을 데가 있다고 빼가겠어"라며 그냥 대리점으로 보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가 고집을 부릴 땐 뒤로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다. 아들이 논쟁에서 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휴대폰을 대신 반납해주겠다고 했더니 아이는 귀찮은 일을 덜게 되어 다행이라는 듯 물건을 얼른 넘겨주었다. 나는 휴대폰을 대리점으로 들고 가 아이의 정보를 모두 삭제했다. 며칠 뒤 아이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아이는 고집 부렸던 일은 싹 잊고 "그럼 잘됐네 뭐"하면서 반가워했다. 저녁 때 기회를 봐서 다시 정보유출에 대해 의견을 나눴더니 이야기가 술술 잘 풀렸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방법은 대학생 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했다.
"아이의 욕구만 알아줘도 서로 소통이 되요"
요즘 아이들은 사춘기도 일찍 시작한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가 초등 4학년 무렵 1차 사춘기라고 할 만큼 반항을 심하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하루도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엄마 지갑에 손을 대는가 하면 필요도 없는 문구들을 수도 없이 사 날랐다. 폭력적인 게임에 맛을 들여 시도 때도 없이 게임에 빠져드는가 하면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하곤 했다.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심경이란 정말이지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지금까지 착하고 곱게 자라던 아들의 변화에 엄마는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를 향해 화를 내거나 나무라는 것, 잔소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 주거나 그 또래 아이들이 누구나 겪는 일쯤으로 생각하고 잘 풀어나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당시 여러 가지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대치도서관에서 ''비폭력 대화법''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돌파구를 찾아 나선 결과였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비폭력 대화법을 전파한 캐서린 한 강사로부터 직접 대화법을 들었다. 어렵기는 했지만 공감이 되었기에 배운 대로 아이에게 시도하기 시작했다. 대화법의 요지는 있는 그대로를 관찰한 후 느낌을 얘기하고 그 느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욕구(need)를 찾아보고 상대에게 부탁을 하는 식의 대화법이었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컴퓨터 게임시간을 지키지 않고 한 시간 넘게 계속하고 있다면 "엄마는 네가 게임 시간을 지키지 않고 한 시간 넘게 하는 것을 보니까 화가 나고 속상해. 왜냐하면 나는 네가 약속을 잘 지켰으면 좋겠고, 저러다 게임중독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야. 내 말 어떻게 생각해?" 처음에는 예전처럼 화가 치밀어 대화법을 적용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지만 아이와 소통해야 서로 살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대화의 물꼬는 서로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엄마의 진심이 전달된 탓인지 서서히 반항으로 일관하던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6학년이 된 아들은 어느 새 엄마의 대화법을 자연스럽게 배워서 힘들어 하는 엄마를 보며 대화를 시작한다.
"지금 엄마 표정이 밝지 않은 거 보니까, 힘든 일 있었구나. 많이 힘들지? (엄마를 꼭 안아주면서) 난 엄마 웃는 모습이 좋은데…."
냉랭한 부자관계 문자로 다리 놓기
아이가 초등학교 때까지 남편과 아들은 서로 죽이 척척 맞았다. 서로 장난도 잘 치고 운동도 같이하고, 어쩌다 남편이 술에 취해 밤늦게 들어와 다음날 아침 내가 잔소리를 하면 아들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아빠가 뭐 일부러 그랬어?"하며 아빠 편을 들어 나를 기막히게 하기도 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을 좋아해 다리가 성할 날이 없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하면 "애들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잔소리 좀 그만해"라는 말로 일축했다.
나로 하여금 ''왕따''를 실감케 했던 죽고 못 사는 둘의 관계가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3학년 경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운동과 친구에만 관심이 있어도 잔소리 한 번 하지 않는 남편이지만 그에게도 참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어른에게 예의가 없거나 밖에 나가 버릇없게 행동하는 것,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 등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귀가하면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슬슬 거짓 핑계를 댔고, 친구들이 좋아지면서 정기적으로 찾아뵙던 할머니 댁에 가는 것도 귀찮아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남편의 눈에 아들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몇 번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봐도 아이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언제부턴가 아들과 대화를 끊기 시작했다.
아들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행동에 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상 아버지의 말에 전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여겼다. 둘의 관계가 단단했던 만큼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서로에 대한 실망이 컸는지 냉랭한 둘의 관계는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었다. 중간에서 나까지 관계가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사소한 일로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어이없기도 했다. 서로 조금만 더 이해하고 하나씩만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부전자전이라고 둘의 고집은 상당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함께 살기만 할 뿐 남남이다 다름없어지겠다 싶어 둘의 관계를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외식도 하고, 영화도 같이 보고 했지만 여전히 냉랭한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함께 사는 가족이 이런 사람들이었구나''라고 새삼 다시 보게 될 정도였다.
고심 끝에 조금이나마 둘의 소통 창구를 마련했다. 아들에게 있었던 일과 중 중요한 것들을 남편에게 문자로 알리고 이와 관련해 아들에게 문자를 보내라는 코치 문자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들의 수련회를 남편에게 알리면 남편은 아들에게 ''이번 수련회에서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 만들기 바란다''라고 문자를 넣는다든가, 아이가 학급회장이 되었다고 알리면 ''축하, 힘들겠지만 이번 경험으로 네 인생이 더 풍요로워졌으면 좋겠다''라고 문자를 넣는 식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는 날은 표정이 밝다.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이 느껴지나 보다. 아직 둘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믿는다. 둘의 내면에는 깊은 애정이 깔려 있고, 시간이 지나면 남편도 아들도 서로에 대해 훨씬 더 너그러워질 것이라는 것을….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