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제13회 강남미술대전에서 서양화가 윤영애(61)씨가 대상을 받았다. 그는 30대 중반에 문화센터에서 처음 그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바람 쏘일 겸 나선 거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난 무슨 일을 해도 그런 식으로는 안 한다"는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뒤로 질끈 동여맨 머리에 간편복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앞치마를 두르고 붓을 들었다.
상처 입은 운문사 소나무를 그리는 이유
윤영애씨에게 그림은 고상한 취미 생활이 아닐까 생각한건 착각이었다.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에서 만난 그녀는 캔버스 앞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자유스튜디오에서 매일 7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이번에 대상을 받은 작품 ''사랑이 개입한 시선''은 그런 열정 아래서 탄생했다. 수상작에 대해 묻자 그녀는 현대미술 책들을 살펴보면서 떠오른 느낌을 그림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녀는 소재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 둥치에 상처를 입은 소나무들을 그리고 있다. 청도 운문사 들어가는 길의 소나무다. "거기에 있는 나무들은 다 저렇게 둥치가 깊게 패여 있어요. 일제시대 때 군수물자로 쓸 송진을 받아내느라 소나무에 칼질을 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도 나무는 꿋꿋하게 자랐다. 그 모습이 작가의 감성을 자극했다. "나도 아픈 시절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무의 아픔이 보인 것이죠."
외환위기 뒤 십 년의 공백은 수양의 기회
그녀는 30대 중반에 붓을 잡았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엄마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다가 ''내가 열심히 사는 게 아이를 위해서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의 지지가 힘이 됐다. 마침 문화센터가 등장하던 시기여서 한국일보문화센터에 등록을 했다.
처음 배우는 그림이었지만 취미로 할 생각은 없었다. 뭐든 대충하는 일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어깨가 아프도록 그림을 그렸다. 소질도 없는데 붙들고 있는 게 아닐까 회의가 들 때면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제게 달란트를 주세요."
10년이 지나며 국전이나 구상전, 목우회전, 현대미술전에서 잇따라 상을 받았다. 자신감이 붙어갈 무렵 외환위기가 터졌다. 남편의 사업이 흔들렸다. 그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07년에 다시 붓을 잡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때는 속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시련이 저를 수양할 수 있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계속 잘 나갔다면 조금 교만해졌을 지도 몰라요. 다시 시작한 뒤로는 더 열심히 했고 집념도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이젠 붓을 놓으면 정말 끝이다, 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혼자 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될까, 하는 고민 때문에 수도 없이 지우고 수도 없이 버렸다. 이번에 수상을 계기로 그녀는 비로소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젠 나를 믿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름이면 그녀는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다. 이번이 세 번째다. 서희와 길상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법정 스님 산문집을 보고는 허투루 살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깨닫는다. 시도 그림도 어떤 것도 절실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맘 편히 작업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이 절실한 바람
그녀는 살림도 즐긴다. 특히 요리를 좋아해, 인터뷰하던 날 아침에는 머위 잎으로 반찬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갯살을 넣고 들기름도 넣고 볶았다. 리포터에게 주려고 한 통을 싸올까 하다가 참았단다.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실례가 아닌가 해서다. 건강은 걷는 운동으로 챙긴다. 작업이 끝나면 예술의 전당에서 반포에 있는 집까지 40분을 걸어서 간다. 길가의 풀도 보고 나무도 보면서 가다보면 어느새 집이다.
그녀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맘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술의전당이 작가지망생들에게 자유스튜디오를 싼값에 빌려주는 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스튜디오 이용자들은 11월이면 작품을 하나씩 내야 한다. 예술의전당은 이를 심사한다. 수준이 되는 작품 4 점을 뽑아 전시회를 열어주고 그때부터 작가로 대우해준다. 그림이 뽑혀서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면 기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스튜디오를 더 이상 이용하지 못한다. 이곳은 지망생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다시 시작한 이후로는 힘든 줄도 모르고 마냥 좋기만 하다는 윤영애 작가. 그가 생각하는 그림의 매력은 뭘까.
"이걸 하다보면 알지 못 할 길로 자꾸 가게 돼요. 그게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아마 그 매력에 죽을 때까지도 붓을 놓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진 김태헌 작가( 스튜디오 세가)
신운영 리포터 suns1693@naver.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