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년 이상 함께 산 부부의 황혼이혼이 결혼 4년 안에 헤어지는 신혼이혼을 훨씬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사유로는 성격차이로 인한 것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이 경제문제, 배우자 부정, 가족 간 불화, 육체적 학대 순이었다.
예전에는 결혼할 때 백년해로(百年偕老)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평균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제2의 삶인 노년기를 마음에 맞는 동반자와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자식 때문에, 혹은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억울해서 그냥 참고 넘긴다는 시니어들, 그들의 가슴속 못 다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정리 강남서초내일신문 편집팀
끼 많은 남편, 그 버릇 여전히 못 고쳐
부부동반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나와 남편은 말이 없다. 여느 때 같으면 내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 트집을 잡았겠지만, 매번 똑같은 일로 실랑이하는 것도 이젠 지쳤다. 결혼생활 28년여 동안 항상 부부싸움의 원인이 됐던 남편의 버릇, 이제는 적응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용납이 안 된다.
모든 여자에게 필요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 그 여자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만드는 오지랖, 그 가벼움과 경솔한 행동에 신물이 난다. 오늘도 동네 배드민턴 회원들과 부부동반 저녁식사가 있었는데 술이 한잔 들어가더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설치는 남편 때문에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말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옆에 앉은 다른 집 부인과 반말을 하면서 가벼운 스킨십까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거의 5~6년을 보아온 사람들이라 친구 못지않은 돈독한 사이인 것 이해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살 연하인 남편은 본래 성격이 밝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무심하고 이성적인 나와는 정반대되는 사람이어서 젊었을 때는 그것이 장점으로 보였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외모도 남편이 훨씬 젊어보였고, 상대적으로 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시달려야 했다. 모 회사 영업부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타고난 언변과 활달한 성격으로 승승장구했고, 40대 초반에는 작은 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어려웠던 IMF때에도 잘 견뎌 지금은 꽤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키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초등학교, 중학교(지방의 소도시) 동창회를 소집하고 임원을 맡는 등 사적인 모임에도 열의를 보였다. 10여 년 전, 남편 동창회에 처음 부부동반으로 나갔다가 남편에게 크게 실망한 후, 우리 부부는 그런 유사한 일들로 잦은 말다툼을 했다. 몇 년 전에는 여자동창하고 문자를 주고받다가 나한테 들켜 이혼을 들먹이며 심각하게 싸운 적도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주민과 마주쳤을 때도 유난스럽게 아는 체를 하며 친절하게 구는 남편. 그 상대가 여성일 경우에는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럽다.
''내가 옆에 있어도 저 정도니 내가 없는 자리에선 오죽 할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언짢다. 또 워낙 운동을 좋아해 골프, 등산, 배드민턴, 자전거 동호회 등 안 끼는 데가 없어 주말이면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때문에 집안 대소사는 물론 애들 교육도 다 내 차지였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우리는 어느덧 50대 후반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는 남편의 끼와 오지랖, 그 끝은 어디일까 속만 끊이고 있다.
의처증 남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우리 부부는 여덟 살 차이다. 학교 졸업 후, 새내기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회사선배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일류대학 출신에 모 대기업 과장으로 근무했던 남편은 그 당시 서른을 넘긴 노총각이어서 우리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댁은 인텔리 집안에다 재산도 꽤 있었다. 신랑의 나이가 많은 것 빼고는 별로 흠잡을 데 없는 혼처였다. 그 당시 동갑내기 남자친구들은 군대에 가있거나 아니면 가난한 학생신분이었는데 남편은 고소득자에다 자가용까지 갖고 있었다.
멋진 호텔에서 식사도 하고 해외출장 시에는 값비싼 선물도 안겨주었다. 결혼하기엔 다소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남편의 세련된 매너에 반해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과 동시에 일어났다. 회사 앞에 신혼집을 마련한 남편은 점심식사를 집에 와서 했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했다. 그리고 별일이 없는 한 저녁식사도 집에 와서 먹었다.
아직 아이가 생기기 전이어서 자유롭게 외출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때마다 일일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집들이를 하게 돼 남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친구와 유난히 다정하게 굴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혹시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 일로 밤새 나를 괴롭혔다. 또 내 친구들을 조사하다시피 만나본 후 "00는 행실이 나쁜 것 같으니 만나지 말고, 00는 괜찮은 것 같으니 만나도 된다"며 말도 안 되는 간섭을 시작했다.
그러다 3년 기한으로 해외근무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회사동료들과 한 가족처럼 잘 지냈다. 그리고 딸아이가 태어났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술을 잔뜩 먹고 들어온 남편은 "아이아빠가 내가 아니라 000 아니냐!"면서 미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직원이름을 대며 다그쳤다. 남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나는 진지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남편은 "술김에 말이 잘못 나온 것"이라며 빌고 또 빌었다.
또, 50회 생일기념으로 중국에 여행을 갔던 적이 있었다. 패키지상품으로 간 여행이어서 일행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는데 남자들과 일상적인 인사만 주고받아도 눈을 부라리며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곤 했다. 그런 일들을 수시로 겪으며 30여년을 살았고, 남편은 정년퇴직을 했다. 남편이 큰소리만 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밤에는 불면증으로 시달리는 등 건강이 안 좋은 상태다. 지금은 결혼해서 분당에 살고 있는 딸한테 잠시 와있지만, 이런 남편과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할 생각을 하니 앞길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매사에 까다로운 남편, 평생을 참아왔지만...
남들은 이 나이 때면 자식들 모두 출가시켜놓고 맘 편히 지낸다는데, 나는 성격 까다로운 남편 탓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남편이 사업을 크게 한 덕분에 겉보기에는 좋은 집에 살면서 호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속은 정말 썩을 대로 다 썩었다.
며칠 전에는 몸이 안 좋은데도 억지로 일어나 아침 밥상을 차려주었더니 국이 너무 짜다고 "안 그래도 혈압 높은 사람을 일찍 죽이려고 이러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남편은 평생 나를 이런 식으로 대했다.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나를 두고 어디 아프냐는 말 한마디 없이 성질부터 부린다.
내 나이 60대 중반을 넘기고 보니 음식 간 맞추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에 이 정도는 이해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국이 짜면 물을 더 넣으면 되지 아침부터 아프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독한 말을 해야 하나. 나도 혈압도 높고 당뇨도 있는데 내 병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몸만 챙기는 게 너무 야속하고 서럽기까지 하다.
젊었을 때에는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살았고 나이 들어서는 애들 혼사에 지장이 있을까봐 또 참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부터 열까지 까칠하기만 한 남편의 성격을 더 이상 받아주기가 힘들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이상 참고 살기가 싫다. 이 나이에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
워낙 남편이 완벽주의자인데다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보니 내가 뭘 해도 못마땅해 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매사 이번에는 또 무슨 잔소리를 할지 남편 눈치부터 살피며 살았다. 기껏 힘들게 제사 준비를 해놓으면 "돈을 그 만큼 많이 줬는데 왜 음식이 이것밖에 없냐?"며 타박하기 일쑤고 옷을 사오면 입기가 불편하네, 옷감이 마음에 안 드네 하면서 트집을 잡는 식이다.
애들이 아무리 "이제 엄마 마음 좀 편하게 해드리라"고 당부를 해도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자식들이 모두 제 엄마 편만 든다며 오히려 섭섭해 하는 남편.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하루라도 맘 편히 살고 싶은 생각뿐이다.
나 몰래 동생들 돕는 남편, 이 배신감을 어쩌나
남편은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시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남편이 네 명의 동생들에게 부모 역할을 대신했다. 사정이 이러니 나 역시 결혼하자마자 내 자식을 낳기도 전에 시누이와 시동생들부터 돌봐야했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 사업이 자리를 잡기까지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보따리 장사도 마다않고 온갖 힘든 일을 다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그렇게 해서 남편과 나는 네 명의 동생들과 네 명의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다. 아무리 부모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문제는 남편의 태도였다. 동생들이 결혼을 할 때 나 몰래 집을 마련해 준 걸 남을 통해서 알게 됐던 것이다. 그 후에도 시누이와 시동생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오빠''나 ''형''을 찾았고 남편이 나서서 다 해결해줬다는 것 역시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남편이 그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했다면 나는 엄마와 같은 정을 쏟았는데 돈 문제 앞에서는 양쪽 모두 나를 철저하게 속였다는 것이 너무 분하고 배신감이 컸다. 그 일을 계기로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고 다시는 나 몰래 동생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냈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큰 시누이 친구로부터 남편이 수 십 년 간 나를 속이고 여전히 동생들의 ''물주'' 역할을 해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누이가 자랑삼아 든든한 오빠 얘기를 했다는 거다. 안 그래도 요즘 시누이와 시동생들 뒷바라지에 들어간 돈을 모았으면 큰 부자가 됐을 텐데 싶어 살짝 억울하던 터였다. 고생고생해서 뒷바라지 한 걸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누이들은 능력 있는 제 오빠 만나서 잘 살고 있는 나를 시샘하기까지 하니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친정 여동생이 어려울 때에는 남편이 한 푼도 보태주지 않아서 얼마나 서러웠는데, 게다가 지금까지 생활비를 때마다 타서 쓰고 있는 내 처지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은 내가 요즘 물가가 많이 올라서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하면 "따로 모아둔 돈이 있을 거 아니냐?"며 참으로 인색하게 군다. 그런데 동생들한테는 매번 거금을 마다하지 않았다니 헛웃음만 나올 수밖에. 남편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이 예순을 훌쩍 넘긴 내가 이런 남편과 계속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수 십 년 동안 매번 그렇게 나를 속였고 가난한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남편을 그래도 남편이라고 챙겨주며 살 자신이 없다.
돈은 물론이고 정과 사랑까지도 아끼는 남편
남편은 30년이 넘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이제 일명 ''삼식이(집에서 하루 세 끼를 먹는 남편)'' 생활을 하고 있다. 한가한 남편은 하루 종일 "왜 그렇게 많아" "그렇게 많이 해서 뭐해" "너무 크다" 등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상을 차릴 때도 그릇에 반찬을 너무 많이 담는다고, 장을 볼 때도 양이 너무 많다고, 자동차도 소형차가 제일 좋다고 하고, 외식 할 때도 좀 부족하게 주문해야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무엇이건 간에 크고 고급이고 여유 있는 것에는 싫은 내색이 역력하다. 질이나 효율성 보다는 무조건 저가의 물건 위주로만 구경하고, 물건을 살 때는 싸고 소량인 것을 좋아한다. 음식점도 싸고 맛있는 곳만 찾는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계획했던 것보다 돈을 더 쓰거나 손해를 보면 기분이 나쁘고 분해서 며칠씩 화내고 또 우울해 한다.
남들은 남편이 은퇴해 수입이 없어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시절에도 그랬다. 절약하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인 것 같았다. 뭐든지 아깝고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주위에선 남편이 알뜰살뜰해 헛돈도 쓰지 않고 좋지 뭐가 문제냐고 하지만 이런 것이 물질이나 금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이나 사랑도 무척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아내나 자식에게도 자신의 기준에 맞게 돈을 주면서도 아까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삶은 검소해도 베푸는 것에 넉넉하면 ''삶이 수수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 정도면 ''궁상이고 인색''한 것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은 평생 야무지게 살림하고 알뜰하게 생활해 자식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사셨다. 그분이 절약하는 방법은 아무도 따라할 수 없었다. 노후에 형편이 넉넉한 편인데도 아파트에서 수도세, 전기세, 난방비가 제일 적게 나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셨고,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이 있어도 비싸서 또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그런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려면 지내는 동안 너무 힘들어 자식들도 두 손 두발 다 들곤 했었다. 자식들이 그런 어머니에게 제발 그렇게 살지 마시라고 말리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마음 놓고 돈 쓰시라고 말하는 자식을 볼 때, 내심 돈을 달라는 뜻으로 간주하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다보니 그런 시어머니에게 자식들도 멀어져갔다. 순간순간 정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 상처를 받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남편은 시어머님을 똑 닮았다. 형제 중에 가장 많이 닮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그렇다.
이제 남편은 환갑이 넘었다. 요즘에는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갑을 연다는 뜻은 어른 노릇도 하고 인심 좋게 베풀어야한다는 말이다. 남편은 원래 말이 없으니 입은 다물겠지만 지갑을 열지 않으니 누가 한 번이라도 찾아줄까. 평생을 같이 산 나도 인색한 남편에게서 떠나고 싶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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