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의 아름다움을 통해 클래식 대중화를 꿈꾼다!!
“고양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기치로 내걸고 1999년에 창단된 교향악단으로,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갖춘 연주자들이 뜻을 모아서 고양시를 중심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클래식 대중화에 이바지하고 있는 단체다.” 고양필하모닉오케스트라 홈페이지에 소개된 내용은 이렇게 110여 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지만, 창단 이후 10여 년 넘게 교향악단을 이끌어온 안현성 단장은 지난한 시간들을 버티어왔다. 그는 클래식의 아름다움을 통해 클래식을 전파하는 것이 ‘고양필하모닉’의 창단취지이자 목표라고 말한다.
유니폼에 반해 시작한 밴드부, 음악도의 길 걷게 된 계기가 되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왜 티켓도 잘 팔리지 않는 교향곡을 연주하느냐고. “소수의 특정인들이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클래식의 대중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클래식음악을 포퓰러화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지요” 그래서 그는 매번 정기연주회에서 정통 교향곡을 연주한다. 클래식의 대중화는 순수한 클래식 음악 그대로 대중에게 자주 들려주고 가까이 느끼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라 믿기 때문에.
티켓파워가 없는 연주회를 매년 정기적으로 열고, 봉사차원의 비정기적인 연주회도 자주 갖다보니 “사람들을 제가 갑부인 줄 안다”고 허허 웃는 안 단장. 음악을 전공하고 유학을 갔다 왔다 하면 집이 꽤 살만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안현성 단장의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다.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우연히 고적대를 보게 되면서부터. 음악이 좋았다기보다 어깨에 반짝이는 견장을 단 유니폼에 마음이 끌렸단다. 원주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밴드부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지만 군기가 보통 센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중동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학교에서 제 밴드 이력을 보고 밴드부하라고 하는데 덧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중학교 시절엔 밴드활동을 하지 않았지요” 그러던 그가 다시 밴드부의 트럼펫주자가 된 것은 게시판에 붙은 ‘등록금 면제’라는 글귀 때문이다. 당시 전국 고등학교 최고의 밴드부로 이름을 날리던 명지고등학교의 밴드부 단원이 되면 등록금을 면제해준다는 게시글 하나가 그의 진로를 결정한 계기가 된 것. 명지고 밴드부 트럼펫주자로 연고전, KBS관악경연대회 등 전국적인 큰 행사에 단골로 참여하면서 유니폼이 아닌 음악에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대 적성검사에서 언어와 어학에 월등한 점수가 나왔어요. 그래선지 어학도 재미가 있고 문학적인 소양도 있었는지 국어선생님 권유로 시인이 될 뻔 했었지요” 건국대 음악교육학과로 진학하면서 그는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고, 졸업 후에는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 Trossingen 국립음대 대학원 졸업 후 고양시에 정착, 필하모닉오케스트라 창단하다
독일 만하임에서 시작한 유학생활은 3~4달이 지나면서 가지고 온 돈이 바닥나면서 고난이 시작됐다. 400불만 가지만 1년은 견딜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떠난 유학생활, 집 얻고 월세내고 생활하다 보니 3개월 만에 빈주머니가 됐다. “유학비자로는 정식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불법으로 블랙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지요. 유명한 독일기업 보쉬, 로우 등 다양한 기업체에서 일도 해보고(웃음), 가장 오래 한 것은 지역신문배달이었어요. 아내와 밤새도록 광고전단지를 신문에 끼워 넣고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하는 일은 유학생활이 끝날 때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면서 독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음대로 널리 알려진 Trossingen국립음대 대학원(KA)에 입학하게 된다. 그 과정도 파란만장하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하게 돼 기필코 대학원에 입학해 의료보험 혜택을 받아야 했는데, 그야말로 “예술가를 만드는 과정”인 Trossinggen 대학원 입학이 쉬울 리 없었다.
“꼭 Trossingen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는 그는 “음악성은 있으나 기초가 없다는 말에 천신만고 한 번의 기회를 다시 얻어 어렵다는 현대곡 ‘힌데민트’를 연주했다. 불과 4~5번만의 레슨으로 ”힌데민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극찬을 들으며 드디어 30살에 Trossingen 대학 최초의 한국인유학생이 됐다. 27살이면 음악적 재능이 끝났다고 믿는 독일에서 30살에 Trossingen 대학원에 입학한 것은 이례적인 일. 그래서 그는 지도교수가 가장 기대를 걸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유학생활 내내 뜻하지 않은 일들로 졸업도 입학과 마찬가지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이뤄졌다. 3번의 휴학과 2번의 비자연장 끝에 5년 반 만에 드디어 졸업,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려움 이기고, 12년 동안 정기연주회를 지켜왔다는 자부심 커
대학원 졸업 후 독일에서 자리 잡으라는 권유가 많았다. 그도 그러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형이 세상을 뜨면서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들어와야 할 상황이 됐다.
귀국 후 자리 잡은 곳이 고양시, 이후 그는 고양시의 음악발전을 위해 초석이 되고자 노력해왔다. 96년 일산오페라단이 창단되면서 우연히 오페라단 지휘를 맡게 되고, 당시 공연한 ‘아멜리아 무도회에 가다’란 오페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독일 유학시절 시립윈드오케스트라의 지휘도 맡았었고, 대학원 시절 어깨너머로 지휘를 익히긴 했어요. 전공인 트렘펫이 자기 음악이라면, 지휘는 여러 사람을 아울러 하나의 하모니를 완성시킨다는 일이 매력이죠.” 오페라단 지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지휘공부를 시작해 계절절학기로 체코 Bmo시립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이것을 계기로 99년 경기북부지역 오케스트라가 없던 상황에 고양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된다. 정통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단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지금까지 12년 동안 정기연주회를 지켜온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는 어떤 오케스트라단이든 시립으로 운영되는 것보다 사립으로 운영되는 것이 단원들의 연주 경쟁력을 높이는 데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단다. 전액지원은 오히려 실력향상보다 자칫 안주에 익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50% 정도의 지원 그리고 나머지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오케스트라단의 노력으로 운영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지원은 받을 수 없더라도 고양필하모닉이 고양시문화재단의 상주단체로 인정받아 전국교향악단축제데 당당히 참가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지난 3월 18일 창단 12년째를 맞아 제29회 정기 연주회를 연 고양필하모닉은 매년 3~4회의 정기연주회와 지체장애인, 소외계층, 복지원 등을 방문해 찾아가는 음악회를 다수 개최하는 ‘사연많은(사회활동으로 연주를 많이하는)" 오케스트라로도 알려져 있다. 고양필하모닉의 아름다운 연주는 6월 9일 오전 11시 명현학교에서 열리는 ’찾아가는 음악회‘(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고양시, 고양문화재단, 덕영의료재단, 경기문화재단 후원)에서 만날 수 있으며, 상탄초교에서도 예정되어 있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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