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병원
의학박사 수필가
남호탁 원장
숙변(宿便)이란 게 있다고들 한다. 하도 말들이 많기에 이곳저곳을 뒤적거려 본다. 하지만 서양의학이나 한의학 그 어디에도 숙변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숙변은 도대체 어디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일까? 알고 보니 단식요법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듯하다. 일주일을 굶어도 똥은 나오는데 바로 숙변때문이라나……. 그것 참.
숙변이 있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숙변이 만성피로, 두통, 어깨결림 등의 원인이 된다고들 한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숙변이 노화나 암, 비만의 원인이 된다고까지 말하며 핏대를 세운다. 이쯤 되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을 굶어도 똥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굶어도 소화액이나 세균찌꺼기, 대장벽의 세포 등은 끊임없이 떨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를 숙변이라니?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대장벽은 미끌미끌한 점막으로 덮여 있고 쉼 없이 꿈틀대며 연동운동을 한다. 한데 무슨 수로 똥이 장시간을 대장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론적으로도 숙변이 존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내시경 검사를 10만 건 이상 시행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나나 동료 그 누구도 숙변을 본 적이 없다. 10만 건이라면 적은 숫자는 아닐 터 이만하면 한마디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직접 들여다보니 없다는데 숙변이 있다느니 위험하다느니 하며 목청을 돋우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돈을 싫어하는 정치인과 외계인의 공통점이 뭐냐며 내게 질문을 던진 친구가 있었다.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까지 본 사람은 없다’가 정답이라나.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글을 끼적이고 있는 지금도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무거운 얘기, 진지한 얘기보다는 가벼운 얘기, 유머러스한 얘기를 좋아하는 나이를 살고 있는가 보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숙변과 외계인의 공통점이 뭔지 아느냐고? 이렇게 살짝 틀면 고민들 좀 하겠지? ㅋㅋㅋ.
어쨌거나 숙변은 없다. 매일 대장을 들여다보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아직껏 숙변을 본 적이 없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니 누가 되었든 허깨비 같은 숙변 운운하며 고민하는 일일랑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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