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익 화백의 작업실 문을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갔다. 크고 작은 작품들이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친숙한 소재의 그림들이다. ''서양화가''인 그의 그림이 매우 난해할거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 소탈한 웃음으로 맞는 그의 모습이 화창한 봄날만큼이나 밝고 상쾌하다. 손수 끓여주는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보니 파리의 어느 화랑에 온 것처럼 운치가 가득 묻어난다.
그리움, 그 정감의 세계
미술평론가 신항섭 선생은 "김수익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이해가 쉽다. 그의 조형언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이는 선묘(線描)방식의 형상언어가 주는 명료성 때문이다"라고 피력했다. 이렇듯 그는 그림을 통해 우리만이 갖고 있는 정서나 감정을 쉽고 솔직하게 보여준다. 분석적인 시각이 필요 없는 순수한 한국적인 이미지를 그려내고, 향토적인 정서의 황소 그림이나 과일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의 모습에서는 우리 민족의 애틋한 한이 느껴진다.
"저 그림은 바로 저희 어머니를 그린 것이지요. 제 작품의 주요 테마는 인물이고, 그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많답니다." 일흔이 넘은 노년의 화백은 ''어머니''라는 말에 금세 숙연해진다. 그의 회화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라는 정감의 세계이다. 김 화백은 1941년, 서울에서 열두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흔 다섯에 어머니가 저를 낳아 모유를 충분히 먹이지 못했다"는 그는 초등학교 때 한국전쟁이 발발해 아버지마저 북으로 납치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당시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해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될까도 생각했었다. 그림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고, 마음이 허전할 때면 뒷동산에 올라가 풍경화도 그렸다.
슬픔보다는 밝고 따뜻한 이미지로 표현
홍익대 미술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된 그는 학교 총학생회장을 맡는 등 매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산에 있던 드라마센터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4학년 때에는 작은 영화사를 차리기도 했다.
김 화백은 "어떤 일이든 한번 빠지면 끝을 보고야마는 성격 때문에 낭만적인 연애한번 못해보고 학교를 졸업했다"며 그때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하루에 4시간정도 밖에 못 잤는데 그 버릇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의 그림은 서양화 1세대들의 작품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향수를 내적 정서로 간직하고 있다. 그 당시의 ''향수''란 나라와 언어를 상실한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아픔인 동시에 남북분단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그 원천이다.
하지만 김 화백의 그림에는 그런 절절한 슬픔대신 아련한 그리움이라든가 따뜻함, 포근함이 더 짙게 깔려있다. 그가 그려내는 유년과 고향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연유한 것이지만, 우리들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정서여서 더욱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작품 속의 밝고 따뜻한 이미지는 그가 애용하는 황갈색, 베이지색, 분홍색, 회색, 보라색 등의 색감에서 비롯된다. 또 그림 속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아이들은 우리들의 초상화이며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은 우리들의 누이이자 어머니의 모습인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노년의 행복
그는 홍익대를 거쳐 경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65년부터 동아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20여 년 간 교수로 재직했다. 동아대학교 교수시절에 미대를 지망하던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제자가 지금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 눈높이에 맞추다보니 나이를 잊고 산다"며 활짝 웃었다. 김 화백은 예술의전당 등 여러 화랑에서 총 13회에 걸친 개인전을 가졌다. 또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200여 회의 단체전 및 초대전을 개최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10년 전부터는 작품에 더욱 매진하고 싶어 외부활동을 줄이고 그림만 그린다는 그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작업실로 향한다. 작업실은 현재 살고 있는 서초동의 아파트 바로 옆 상가건물에 있다. 그동안 그려놓은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지나온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행복감에 젖는다고. 여섯 살 연하인 아내도 그와 같은 대학에서 같은 공부를 했지만 자신을 지도하던 은사였기에 한동안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떼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 부부에게는 과천에 살고 있는 아들내외와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사랑스러운 손녀가 있다. 김 화백은 "아들 역시 유럽에서 미술공부를 했는데 처음에는 공무원신분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열심히 뛰고 있다"며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 최선의 길이라고 조언했다. 그의 온화한 미소가 저녁햇살 사이로 밝게 빛났다. ?
사진 이운영 작가 (스튜디오 ZIP)
김선미 리포터 srakim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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