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 부른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는다. 일상에 작은 행복감을 주는 일들도 많지만 더러는 견디기 힘들 만큼의 시련이 찾아오기도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칠까?” 자문해 봐야 소용없는 시련들. 하지만 이런 시련을 통해 단단해지고 비로소 알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 시련을 함께 해준 사람들, 바로 가족의 소중함이다. 장익숙(54ㆍ분당동)씨도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 중 하나.
신혼 초 남편의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어쩌면 행복과는 반대편에 서게 됐는지 모른다.
자신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운전을 할 수 없는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의젓하고 씩씩하던 아이가 우연한 사고에 의해 장애를 얻게 되었고 의지가 되어 주던 어머니에게는 돌연 알츠하이머(치매)가 찾아왔다.
이쯤 되면 줄줄이 사탕 같이 찾아온 불행에 좌절할 법도 한데 오늘의 주인공은 그 속에서 얻어진 기적 같은 행복에 감사해한다. 그녀가 삶을 살아내는 긍정의 법칙을 들어보았다.
교통사고와 안면 기형, 시련은 한꺼번에
남편의 교통사고는 7번의 수술을 거쳐야 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고비를 무사히 넘기자 이번엔 장씨 자신에게 사고가 왔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도로 연습을 하던 중 트럭 밑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게 된 것.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때 받은 충격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 정신적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또래 친구와의 다툼으로 얼굴을 다치게 된다.
아직은 덜 여문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주먹이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왼쪽 얼굴의 성장 판 3곳을 다치고 말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조금씩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5~6학년이 되면 성장이 빨라지잖아요. 얼굴 변형이 심해져 대학병원을 전전긍긍하게 됐죠. 그러다가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됐는데 4차례의 수술이 모두 실패였어요. 당시만 해도 안면 기형이 흔치 않은 때라 수소문 끝에 결국 미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갔죠.”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미국에서의 수술도 역시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했고 아이는 장애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1년여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고 돌아와 보니 대꼬챙이 같던 친정 엄마가 우울증을 시작으로 조금씩 기억을 덜어내고 있었다.
친정어머니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
교직생활을 오래 할 만큼 엘리트에 꼿꼿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던 분이라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렇게 10년여 세월이 흐를 동안 어머니의 치매는 중증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남들은 하나도 벅찰 일들을 한꺼번에 겪으면서도 장 씨는 음지의 기운 속에서 자라는 희망의 싹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초등 6학년부터 중ㆍ고등학교 전 과정까지 입원과 수술을 되풀이하면서도 아이는 씩씩하게 이겨내 줬어요. 한참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도 놀리는 친구보다 감싸주고 이해해준 친구들이 더 많았고요.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보태주셨죠. 주변 친구들, 이웃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선생님들의 배려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서울대도 아닌데 대학에 들어갈 때는 동네잔치까지 했다니까요. 하하하”
운전을 못하는 장 씨 대신 병원에 갈 때는 이웃들이 서로 기사 역할을 자청해 왔고 여러 차례의 수술을 앞두고서는 종교를 떠나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었다.
“오빠 때문에 잔신경 써주지 못했던 막둥이 딸도 제 할 일을 스스로 해주니 기특하고, 장모님 수발을 저보다 더 살뜰히 챙겨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 이면에 감춰진 행복을 느꼈던 거죠.”
채찍으로 단단해진 가족, 이웃의 고마움은 시련의 다른 선물
힘든 순간에도 반드시 잃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감사함이 함께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더 이상 시련이 무섭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도 삶을 꿋꿋이 긍정하는 장 씨의 모습은 주변 이웃들에게 미담이 되기에 충분. 지난해에는 성남시 경로 효행자로 선정돼 상을 받기도 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들, 특히 남편이 받아야 할 상이었어요. 한겨울에도 집밖을 뛰쳐나가는 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비상근무를 섰던 건 물론, 물건을 찢고 던져도 할머니가 아파서 그런 거라며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아이들이 그 상의 주인공이지요.”
폭풍우 같던 세찬 시련으로 가족이 단단히 뭉칠 수 있었고 이웃의 도움으로 힘겨움이 덜어졌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는 장 씨. 틈틈이 짬을 내 장애인 시설에 가족봉사를 다니며 고마움을 갚아내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인생이 주는 배움을 열심히 공부해보자. 그리고 얻어지는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자’ 그녀가 힘든 과정을 거치며 도달한 중간 방점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고 이웃의 고마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얻었다는 그녀는 오늘도 환히 웃을 수 있는 미소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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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겪는다. 일상에 작은 행복감을 주는 일들도 많지만 더러는 견디기 힘들 만큼의 시련이 찾아오기도 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칠까?” 자문해 봐야 소용없는 시련들. 하지만 이런 시련을 통해 단단해지고 비로소 알게 되는 깨달음이 있다. 시련을 함께 해준 사람들, 바로 가족의 소중함이다. 장익숙(54ㆍ분당동)씨도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 중 하나.
신혼 초 남편의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어쩌면 행복과는 반대편에 서게 됐는지 모른다.
자신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운전을 할 수 없는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의젓하고 씩씩하던 아이가 우연한 사고에 의해 장애를 얻게 되었고 의지가 되어 주던 어머니에게는 돌연 알츠하이머(치매)가 찾아왔다.
이쯤 되면 줄줄이 사탕 같이 찾아온 불행에 좌절할 법도 한데 오늘의 주인공은 그 속에서 얻어진 기적 같은 행복에 감사해한다. 그녀가 삶을 살아내는 긍정의 법칙을 들어보았다.
교통사고와 안면 기형, 시련은 한꺼번에
남편의 교통사고는 7번의 수술을 거쳐야 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고비를 무사히 넘기자 이번엔 장씨 자신에게 사고가 왔다. 운전면허증을 따고 도로 연습을 하던 중 트럭 밑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게 된 것.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때 받은 충격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 정신적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또래 친구와의 다툼으로 얼굴을 다치게 된다.
아직은 덜 여문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주먹이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왼쪽 얼굴의 성장 판 3곳을 다치고 말았다. 아이는 자라면서 조금씩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5~6학년이 되면 성장이 빨라지잖아요. 얼굴 변형이 심해져 대학병원을 전전긍긍하게 됐죠. 그러다가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됐는데 4차례의 수술이 모두 실패였어요. 당시만 해도 안면 기형이 흔치 않은 때라 수소문 끝에 결국 미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갔죠.”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미국에서의 수술도 역시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했고 아이는 장애판정을 받았다.
게다가 1년여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고 돌아와 보니 대꼬챙이 같던 친정 엄마가 우울증을 시작으로 조금씩 기억을 덜어내고 있었다.
친정어머니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
교직생활을 오래 할 만큼 엘리트에 꼿꼿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던 분이라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렇게 10년여 세월이 흐를 동안 어머니의 치매는 중증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남들은 하나도 벅찰 일들을 한꺼번에 겪으면서도 장 씨는 음지의 기운 속에서 자라는 희망의 싹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초등 6학년부터 중ㆍ고등학교 전 과정까지 입원과 수술을 되풀이하면서도 아이는 씩씩하게 이겨내 줬어요. 한참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도 놀리는 친구보다 감싸주고 이해해준 친구들이 더 많았고요.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아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보태주셨죠. 주변 친구들, 이웃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셨고 선생님들의 배려로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서울대도 아닌데 대학에 들어갈 때는 동네잔치까지 했다니까요. 하하하”
운전을 못하는 장 씨 대신 병원에 갈 때는 이웃들이 서로 기사 역할을 자청해 왔고 여러 차례의 수술을 앞두고서는 종교를 떠나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해 주었다.
“오빠 때문에 잔신경 써주지 못했던 막둥이 딸도 제 할 일을 스스로 해주니 기특하고, 장모님 수발을 저보다 더 살뜰히 챙겨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 이면에 감춰진 행복을 느꼈던 거죠.”
채찍으로 단단해진 가족, 이웃의 고마움은 시련의 다른 선물
힘든 순간에도 반드시 잃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감사함이 함께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더 이상 시련이 무섭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힘든 과정에서도 삶을 꿋꿋이 긍정하는 장 씨의 모습은 주변 이웃들에게 미담이 되기에 충분. 지난해에는 성남시 경로 효행자로 선정돼 상을 받기도 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우리 가족들, 특히 남편이 받아야 할 상이었어요. 한겨울에도 집밖을 뛰쳐나가는 어머니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비상근무를 섰던 건 물론, 물건을 찢고 던져도 할머니가 아파서 그런 거라며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아이들이 그 상의 주인공이지요.”
폭풍우 같던 세찬 시련으로 가족이 단단히 뭉칠 수 있었고 이웃의 도움으로 힘겨움이 덜어졌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는 장 씨. 틈틈이 짬을 내 장애인 시설에 가족봉사를 다니며 고마움을 갚아내고 있다.
‘살아가는 동안 인생이 주는 배움을 열심히 공부해보자. 그리고 얻어지는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자’ 그녀가 힘든 과정을 거치며 도달한 중간 방점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고 이웃의 고마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얻었다는 그녀는 오늘도 환히 웃을 수 있는 미소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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