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에 3대가 사는 대가족제에서는 부모 모시는 일은 당연했다. 과거엔 부모를 외면하는 자식은 멍석말이를 당할 정도로 효에 대한 생각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핵가족이 되면서 부모모시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했다.
늙은 부모가 경제력이 떨어질 경우 자식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매년 명절이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서 부모부양이나 재산문제로 부모와 자식간, 형제들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법정까지 가는 일도 허다하다.
마음이 불편한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 “생전 재산상속은 절대 안 할 것”
김 모(대전시 원촌동·여·80)씨에겐 3남 2녀의 자식들이 있지만 대전 근교의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김 씨는 퇴행성관절염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해 외출이 어렵고 실내에서는 바퀴달린 의자에 의존해야 한다. 골밀도 수치도 40이하여서 골절위험도 매우 높다.
5년 전 남편이 죽자 작은 밭을 혼자 일구고 있지만 손가락이 굽고 무릎이 펴지지 않아 농사일도 쉽지 않다.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자식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시골에 들어와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둘째아들, 간병인과 집안일을 함께 해줄 도우미를 찾아야 한다는 첫째와 막내아들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딸들도 의견은 마찬가지였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것에 형제들이 반대하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형제들은 둘째가 어머니 부양을 빌미로 1000여 평에 달하는 논과 밭, 과수원, 시골집을 가로채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김 씨는 하루에 4시간씩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길을 택했다.
김 씨는 다섯 형제 중 가장 효심이 깊은 둘째와 함께 살고 싶지만 다른 형제들과 불화 때문에 포기했다.
김 씨는 “자식들이 나보다 재산 때문에 자주 찾아오는 것을 안다”면서 “생전엔 절대 재산상속을 하고 싶지 않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구박받더라도 자식과 함께 살고 싶어
양 모(대전시 둔산동·여·76)씨는 2년 전 남편이 죽고 나서 몇 달 전까지 혼자 생활했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양 씨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자식과 함께 살다 죽는 것이 진짜 양 씨의 바램이다.
양 씨는 힘들게 과일 장사를 하고 그것도 부족해 살던 집을 전세로 옮기면서까지 세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쳤다. 그런데 자식들은 빈말이라도 ‘같이 살자’라는 말 한번 하지 않는다.
혼자 살던 양 씨는 3달 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한 달여 병원신세를 지다 퇴원을 했지만 체력이 떨어져 혼자 생활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부양문제로 세 아들은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첫째와 둘째 아들은 사업과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부양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아들은 ‘부모님은 당연히 첫째 형이 모셔야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첫째와 둘째가 한 달에 20만원씩 생활비를 보태고, 양 씨가 살던 전세 5000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막내아들이 모시기로 결정했다.
막내아들 집에 들어간 양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저녁 늦게 퇴근해 ‘밥 먹자’는 말 외에는 입을 닫아 버리는 아들, 냄새 난다며 방에는 들어오지 않는 손자들, 의무적으로 밥만 챙겨주는 며느리,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는 첫째와 둘째아들 때문에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중 셋째 며느리와 손자들이 해외로 한 달여 동안 장기 여행을 떠났다. 첫째와 둘째아들은 한 달만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셋째아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양 씨는 할 수 없이 요양원으로 가게 됐다. 요양원에 간 양씨는 ‘나도 저 노인들처럼 버려지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한 달을 보냈다.
◆ 신분 확인 안 되면 시설로 보내준다는데…
노 씨(대전시 용두동·남·75)는 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치료는 받았지만 한 쪽 팔과 다리가 자유롭지 못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그동안 혼자 생활했지만 이젠 보호자가 필요하게 됐다.
군무원인 첫째아들과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둘째아들이 6개월씩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노 씨는 월 50만원씩 생활비를 내 놓기로 했다. 노 씨는 살던 집을 6000만원에 처분했고, 자식들은 집 처분한 돈으로 병원비와 생활비를 내라고 요구했다.
아들집에 들어간 노 씨는 크고 작은 문제로 며느리와 부딪혔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수저와 젓가락질이 서툴러 밥상 주변은 늘 지저분했다. 또 대소변이 옷에 묻기 일쑤였고, 변이 딱딱해 변기가 막히는 일도 종종 있었다.
노 씨 때문에 아들부부의 싸움도 잦아졌다. 아들 부부의 싸움 소리에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였던 노씨.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둘째 아들 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둘째아들 내외는 노 씨 모시기를 거부했다. 대신 노 씨가 주는 생활비 50만원에 아들 내외가 20여만 원을 보태 요양병원에 맡기겠다고 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노 씨는 이런 저런 걱정이 앞선다.
집을 처분한 돈이 5000만원 남아있지만 치료비와 병원생활비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근심만 늘었다. 자식들에게는 절대 짐이 되기 싫다는 노 씨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돈 다 떨어지면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모르는 지역으로 가 경찰서 앞에 앉아 있지 뭐. 묻는 말에 아무 말도 않고 신분 확인 안 되면 시설로 보내준다는데...”
◆ 상속 재산 다시 내 놔!
슬하에 1남 4녀의 자녀를 둔 박 모(대전시 판암동·여·74?)씨.
상가와 땅을 소유하고 목욕탕을 운영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던 박씨. 10여년 전 지인들의 말만 듣고 건강보조식품 사업에 투자했지만 부도가 났다.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하자 상가와 땅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바꿨다.
박 씨는 재산을 처분하고 싶지만 자식들이 동의를 하지 않는다. 아파트를 팔아 막내딸을 도와주고 싶지만 큰딸이 반대하고 나섰다. 박 씨는 “큰 딸이 아파트는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 역시 ‘그럼 상가는 내 몫’이라고 결정한 눈치다.
명절에 다섯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왜 공동명의로 바꿔 놓지 않았느냐”며 투덜댄다.
박 씨는 “어쩔 수 없이 명의를 바꾼 건데 재산 문제로 자식들이 자주 다툰다”면서 “명의를 다시 찾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 “주택담보연금대출로 편하게 살거야”
70대 중반의 고 씨 부부는 2남 2녀의 자식을 뒀다.
남아선호사상이 워낙 강했던 고 씨는 공부 잘하는 딸들을 제쳐두고 두 아들만 대학을 보냈다. 결혼 할 때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라며 돈도 보탰다. 자신들이 늙으면 챙겨줄 자식은 아들뿐 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고 씨 부부의 생각은 빗나갔다. 공무원인 큰 아들은 생활이 빠듯하다며 지금껏 생활비 한번 보태주지 않았다. 전기기사인 둘째 아들 역시 생활이 어렵다며 부모를 외면했다.
그런데 딸들은 부모에게 극진하다. 자주 외식을 시켜주고 용돈에 옷도 사준다.
둘째딸은 같이 살자고도 한다. 빈 말이라도 고 씨 부부는 둘째 딸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아들내외는 명절이나 제사 때만 얼굴을 내민다.
명절에도 전날 내려왔다 명절날 아침만 먹곤 처갓집에 들른다며 바로 집을 나선다.
어머니인 이 씨는 지나가는 말로 큰 며느리에게 “우린 나중에 큰 애랑 같이 살거다”라고 하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배시시 웃고 만다.
맏며느리였던 이 씨는 치매 시어머니를 5년 동안이나 모신 효부였기에 큰 며느리의 반응에 속이 속상하다. 말은 같이 살자고 했어도 이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절대 아들내외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병들면 요양원에 들어갈 생각도 한다. 수입이 없는 고 씨 부부는 생활이 어려워지면 딸들이 권하는 대로 살고 있는 주택을 담보로 노후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방안을 찾고 있다.
김진숙 리포터 kjs997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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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부모가 경제력이 떨어질 경우 자식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다. 매년 명절이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에서 부모부양이나 재산문제로 부모와 자식간, 형제들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법정까지 가는 일도 허다하다.
마음이 불편한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 부모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 “생전 재산상속은 절대 안 할 것”
김 모(대전시 원촌동·여·80)씨에겐 3남 2녀의 자식들이 있지만 대전 근교의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김 씨는 퇴행성관절염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해 외출이 어렵고 실내에서는 바퀴달린 의자에 의존해야 한다. 골밀도 수치도 40이하여서 골절위험도 매우 높다.
5년 전 남편이 죽자 작은 밭을 혼자 일구고 있지만 손가락이 굽고 무릎이 펴지지 않아 농사일도 쉽지 않다.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자식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시골에 들어와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둘째아들, 간병인과 집안일을 함께 해줄 도우미를 찾아야 한다는 첫째와 막내아들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딸들도 의견은 마찬가지였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것에 형제들이 반대하는 속사정은 따로 있다.
형제들은 둘째가 어머니 부양을 빌미로 1000여 평에 달하는 논과 밭, 과수원, 시골집을 가로채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김 씨는 하루에 4시간씩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는 길을 택했다.
김 씨는 다섯 형제 중 가장 효심이 깊은 둘째와 함께 살고 싶지만 다른 형제들과 불화 때문에 포기했다.
김 씨는 “자식들이 나보다 재산 때문에 자주 찾아오는 것을 안다”면서 “생전엔 절대 재산상속을 하고 싶지 않다”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구박받더라도 자식과 함께 살고 싶어
양 모(대전시 둔산동·여·76)씨는 2년 전 남편이 죽고 나서 몇 달 전까지 혼자 생활했다.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며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양 씨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자식과 함께 살다 죽는 것이 진짜 양 씨의 바램이다.
양 씨는 힘들게 과일 장사를 하고 그것도 부족해 살던 집을 전세로 옮기면서까지 세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쳤다. 그런데 자식들은 빈말이라도 ‘같이 살자’라는 말 한번 하지 않는다.
혼자 살던 양 씨는 3달 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한 달여 병원신세를 지다 퇴원을 했지만 체력이 떨어져 혼자 생활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부양문제로 세 아들은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첫째와 둘째 아들은 사업과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부양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아들은 ‘부모님은 당연히 첫째 형이 모셔야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첫째와 둘째가 한 달에 20만원씩 생활비를 보태고, 양 씨가 살던 전세 5000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막내아들이 모시기로 결정했다.
막내아들 집에 들어간 양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저녁 늦게 퇴근해 ‘밥 먹자’는 말 외에는 입을 닫아 버리는 아들, 냄새 난다며 방에는 들어오지 않는 손자들, 의무적으로 밥만 챙겨주는 며느리,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는 첫째와 둘째아들 때문에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중 셋째 며느리와 손자들이 해외로 한 달여 동안 장기 여행을 떠났다. 첫째와 둘째아들은 한 달만 어머니를 보살펴 달라는 셋째아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양 씨는 할 수 없이 요양원으로 가게 됐다. 요양원에 간 양씨는 ‘나도 저 노인들처럼 버려지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한 달을 보냈다.
◆ 신분 확인 안 되면 시설로 보내준다는데…
노 씨(대전시 용두동·남·75)는 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치료는 받았지만 한 쪽 팔과 다리가 자유롭지 못하고 말도 어눌해졌다. 그동안 혼자 생활했지만 이젠 보호자가 필요하게 됐다.
군무원인 첫째아들과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둘째아들이 6개월씩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노 씨는 월 50만원씩 생활비를 내 놓기로 했다. 노 씨는 살던 집을 6000만원에 처분했고, 자식들은 집 처분한 돈으로 병원비와 생활비를 내라고 요구했다.
아들집에 들어간 노 씨는 크고 작은 문제로 며느리와 부딪혔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수저와 젓가락질이 서툴러 밥상 주변은 늘 지저분했다. 또 대소변이 옷에 묻기 일쑤였고, 변이 딱딱해 변기가 막히는 일도 종종 있었다.
노 씨 때문에 아들부부의 싸움도 잦아졌다. 아들 부부의 싸움 소리에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였던 노씨.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둘째 아들 집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둘째아들 내외는 노 씨 모시기를 거부했다. 대신 노 씨가 주는 생활비 50만원에 아들 내외가 20여만 원을 보태 요양병원에 맡기겠다고 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노 씨는 이런 저런 걱정이 앞선다.
집을 처분한 돈이 5000만원 남아있지만 치료비와 병원생활비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근심만 늘었다. 자식들에게는 절대 짐이 되기 싫다는 노 씨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돈 다 떨어지면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모르는 지역으로 가 경찰서 앞에 앉아 있지 뭐. 묻는 말에 아무 말도 않고 신분 확인 안 되면 시설로 보내준다는데...”
◆ 상속 재산 다시 내 놔!
슬하에 1남 4녀의 자녀를 둔 박 모(대전시 판암동·여·74?)씨.
상가와 땅을 소유하고 목욕탕을 운영했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던 박씨. 10여년 전 지인들의 말만 듣고 건강보조식품 사업에 투자했지만 부도가 났다.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하자 상가와 땅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바꿨다.
박 씨는 재산을 처분하고 싶지만 자식들이 동의를 하지 않는다. 아파트를 팔아 막내딸을 도와주고 싶지만 큰딸이 반대하고 나섰다. 박 씨는 “큰 딸이 아파트는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 역시 ‘그럼 상가는 내 몫’이라고 결정한 눈치다.
명절에 다섯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왜 공동명의로 바꿔 놓지 않았느냐”며 투덜댄다.
박 씨는 “어쩔 수 없이 명의를 바꾼 건데 재산 문제로 자식들이 자주 다툰다”면서 “명의를 다시 찾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 “주택담보연금대출로 편하게 살거야”
70대 중반의 고 씨 부부는 2남 2녀의 자식을 뒀다.
남아선호사상이 워낙 강했던 고 씨는 공부 잘하는 딸들을 제쳐두고 두 아들만 대학을 보냈다. 결혼 할 때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라며 돈도 보탰다. 자신들이 늙으면 챙겨줄 자식은 아들뿐 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고 씨 부부의 생각은 빗나갔다. 공무원인 큰 아들은 생활이 빠듯하다며 지금껏 생활비 한번 보태주지 않았다. 전기기사인 둘째 아들 역시 생활이 어렵다며 부모를 외면했다.
그런데 딸들은 부모에게 극진하다. 자주 외식을 시켜주고 용돈에 옷도 사준다.
둘째딸은 같이 살자고도 한다. 빈 말이라도 고 씨 부부는 둘째 딸에게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아들내외는 명절이나 제사 때만 얼굴을 내민다.
명절에도 전날 내려왔다 명절날 아침만 먹곤 처갓집에 들른다며 바로 집을 나선다.
어머니인 이 씨는 지나가는 말로 큰 며느리에게 “우린 나중에 큰 애랑 같이 살거다”라고 하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배시시 웃고 만다.
맏며느리였던 이 씨는 치매 시어머니를 5년 동안이나 모신 효부였기에 큰 며느리의 반응에 속이 속상하다. 말은 같이 살자고 했어도 이 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절대 아들내외와 같이 살 생각이 없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병들면 요양원에 들어갈 생각도 한다. 수입이 없는 고 씨 부부는 생활이 어려워지면 딸들이 권하는 대로 살고 있는 주택을 담보로 노후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방안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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