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반세기종합전 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

상전벽해로 농촌에서 자족적인 도시로 변모

강남개발이 끝나고 경제 교육 문화 등 서울의 중심지로 성장

지역내일 2011-02-14 (수정 2011-02-14 오전 10:08:07)

서울역사박물관은 ‘강남 개발 40년’을 맞이해 지난 연말부터 2월 27일까지 ‘강남 40년, ‘영동’에서 ‘강남’으로’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서울 반세기 도시 성장사 중에서 강남지역의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관람객 중에 강남에서 조상대대로 살았던 원주민이나, 1970년대 강남에 이주해 삶의 터전을 잡았던 이주민 1,2세대, 강남이 개발되고 교육의 중심지로 각광받으면서 강남에 이주한 사람들 모두 각각 자신에게 해당되는 사연과 추억을 간직한 자료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강남 개발 40년에 대해 강남토박이들은 ‘상전벽해’란 말로 표현했으며, ‘영등포의 동쪽’이라 영동지구로 불리던 강남으로 이주해 살았던 이주민들은 자신들도 강남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산증인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살았고 또 어떻게 살았던 지금의 강남은 경제ㆍ교육ㆍ문화 등 서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강남 개발 40년을 되돌아보면서 그 시절에 강남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보았다.





강남 40년…농촌에서 신천지로


▶개발이전의 강남 ‘조용한 농촌’
강남은 1960년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근교지역으로서 채소밭과 과수원이 있는 조용한 농촌이었다. 1960년 이후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강북도심의 팽창과 과밀화로 새로운 택지가 필요해 강남개발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강남개발의 출발점, 제3한강교
1969년에 개통된 제3한강교는 강남개발시대를 여는 출발점이었으며 말죽거리의 신화로 불리는 강남 땅값 폭등의 원인이었다. 1970년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시민들에게 강남을 인식하게 만들며 강남개발이 본격화됐다. 강남지역에 영동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었는데, 현재 서초구 일대인 영동 1지구에서 먼저 시작되고 1971년부터 현재 강남구 지역인 영동2지구가 개발되었다. 이 영동개발 덕분에 오늘날 강남구와 서초구가 탄생되었다. 

▶가자, 강남으로 ‘지는 강북, 뜨는 강남’
1970년대 초 영동지구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공무원 아파트 건설, 공공기관 이전, 학교와 고속버스터미널 이전 등 다양한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강북은 특정시설 제한이나 도심 재개발지구 지정 등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 정체되어 있는 동안 강남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신천지 강남
1969년 제3한강교,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1963년 3.3㎡당 3백~4백원하던 압구정동과 신사동 등의 땅값은 1만원~1만5천원으로 폭등했다. 땅값 폭등을 부추긴 것은 부동산소개업자와 일명 복부인들이었다.
강남은 아파트 천지였다. 1985년 자료에 의하면 강남지역 주택의 72.7%가 아파트였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압구정동과 대치동을 중심으로 고층아파트가 형성되면서 강남은 아파트 도시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또한 강남은 강북도심에서 이전한 명문중고등학교와 신설고등학교가 명문대학에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면서 이른바 8학군으로 불리는 명문학군이 되었다. 

▶강남의 완성, 강남의 백만 시대
1960년대 말에 시작된 강남개발사업은 1980년대 초에 시작된 개포지구개발로 거의 막을 내렸다. 개포지구 택지개발은 현재 강남구 개포동과 도곡동일대, 경기도 과천 주암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계획이었다.
개발이 끝나가면서 강남지역은 주거중심 도시에서 자족적 도시로 완성되었다. 기존의 주거지 중심에서 업무와 문화도시로의 신기능이 부가되면서 강남은 서울의 또 다른 서울로 부상했다. 그 대표적인 지역으로 지하철 2호선을 따라 형성된 테헤란로의 업무시설, 삼성동과 서초동 일대의 문화시설로 강남은 자족적인 도시서비스가 가능한 공간으로 성장했다. 

자료제공 및 도움말 서울역사박물관






압구정동은 내 고향
세상에 공개된 1970년 이전의 강남 자료사진을 보면 압구정 향우회에서 제공한 것이 많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가 고향이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고향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압구정리에서 살던 사람들은 1960년대 말까지도 굽이치던 한강을 바라보면서 배농사를 짓고 평화롭게 살았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들은 고향을 떠나는 사람, 잔류하는 사람으로 나뉘며 뿔뿔이 헤어져야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 대금으로 받은 압구정동의 한강 공유수면(국가 소유의 수면)을 매립해 아파트를 지었다. 압구정리 사람들은 어느 날 불도저의 굉음을 들으며 자신들의 집터가 십여 미터 땅속으로 묻히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압구정 향우회 나종덕(55) 총무는 조상대대로 압구정동에 살았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배농사를 지었었다. 개발이 되면서 나씨 가족은 가까운 신사동으로 이주해 고향을 지킨 셈이다. 그는 지금도 압구정동에 살면서 마음속에 고향을 간직하고 산다. 
나종덕(55세 강남토박이 압구정 향우회)




상전벽해란 말이 딱 어울려
“상전벽해란 말이 있지? 내 고향이 이렇게 변할 줄 꿈에도 몰랐어”라고 강남토박이 문영준씨는 말문은 열었다. 그는 할아버지 때부터 신사동에서 150년을 산 토박이다. 그는 어릴 적에 전기도 없이 살았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학교를 다녔는데 제3 한강교가 개통되고 강남이 개발되면서 고향이 천지개벽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고향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어. 개발이 되면서 이 지역이 좋아지는 것을 훤히 눈뜨고 보면서도 농지를 팔 수 밖에 없었지. 농사꾼이라 농사짓는 것 밖에 모르는데, 남아도 할 게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는 10년 전에 신사동을 떠났지만 지금도 학동에 있는 학리 노인정을 자주 찾는다. 이곳이 고향이고 친구들이 있어 꿈에도 잊지 못할 곳이기 때문이다.
문영준(81세 강남 토박이)




영동이란 키워드
현재 강남으로 통칭되는 강남구와 서초구는 과거에 영등포의 동쪽이란 뜻으로 영동이라 불렸다. 그래서 당시 강남에서는 영동시장 영동중학교 영동고등학교 영동여고 영동가구 영동세브란스 영동대교 등 ‘영동’이란 말을 도처에서 접할 수 있었다. 
1975년 영동지역의 의료시설은 일반개업의 27개소 정도로 열악했다. 1983년 연세의료원은 8년의 준비 끝에 ‘영동세브란스 병원’를 개원을 했고 강남주민들은 종합병원이며 대학병원인 이곳에서 만족하며 진료를 받았다. 영동 세브란스라는 지역성이 가미된 명칭은 2009년 3월에 강남세브란스로 개명됐다. 영동세브란스의 개원부터 지켜봤던 지역주민들은 영동에서 강남으로 변화된 시대의 흐름을 병원의 명칭에서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자료 ‘영동세브란스 병원 10년사’




8학군의 시작은 경기고등학교
정부는 강남을 개발하면서 강북의 명문학교를 대거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경기고와 서울고를 시작으로 휘문고, 숙명여고 등이 뒤를 따랐다. 이것이 8학군의 시작이었다.
맨 처음으로 강남에 자리 잡은 경기고는 대학캠퍼스 같은 넓은 교정에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 화동의 집 등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고교 평준화 이전부터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를 가르쳤던 쟁쟁한 교사진이 강남의 신입생을 맞이했다. 강남으로 이주해 경기고에 입학할 수 있었던 학생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학교에 다녔다.
당시 경기고는 산을 깎아 학교를 지었기 때문에 교정에는 돌 천지였다. 삼성동 첫해 신입생인 75회 학생들은 1년 내내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에 운동장에서 돌을 골라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신상도(51세 이주 2세대 경기고 75회 졸업생)




1972년 공무원 아파트로 이사해
1971년 서울시는 논현동에 12평과 15평짜리 아파트 12개동 360가구를 건설해 무주택 공무원들에게 분양했다. 나는 72년 초등학교 2학년 때,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이사했다. 당시 논현초등학교가 개교 전이라 78번 버스를 타고 남영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하교 길에 버스를 타고 오다 신사동에 내려야 하는데 잠시 졸다 신사동을 지나쳐 종점인 말죽거리에 내리면 허허벌판 시골 모습을 보며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후 나는 역삼동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논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선여중 1회, 강남으로 이전한 숙명여고의 첫 번째 입학생이 되었다. 당시 진선여중이나 숙명여고는 사립학교로 난 개발지에 걸맞게 새로 지은 건물에 시설이 좋은 학교를 다녔다. 반면에 나의 연년생 언니는 논현초등학교, 남녀공학인 영동 중학교, 은광여고를 다녔다. 언니는 학교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 역삼동 집에서 논과 밭이 군데군데 남아 있던 말죽거리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언니는 강남 토박이 친구들도 많았고 나보다 훨씬 강남 토박이 문화 속에 살았던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는 1983년에 개통한 2호선 역삼역을 이용했는데 그때는 역삼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물어 역에서 사람을 만나면 조금 무섭기도 했다. 요즘도 나는 내가 살던 동네이며 모교인 숙명여고가 보이는 아파트에 산다. 강남 이주 2세대인 나는 어느 새인가 강남이 나의 고향이란 마음이 든다.
전소정 (48세, 이주 2세대 )




강남과 함께 성장한 나의 40년
1974년 초등학교 5학년 때 강남으로 이주했는데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건널 때면  신사동 초입에 ‘영동개발지구’라고 커다랗게 쓰인 간판이 있었다.   
그때 강남은 농촌과 도시가 공존한 지역으로 비가 오면 진흙탕 길을 걸어 다니고 무밭에 가서 무도 뽑아먹고 뒷산에서 칡뿌리를 캐먹기도 했다. 오히려 강북으로 학교를 다녔던 형과 누나에 비해 난 시골 아이 같은 경험을 많이 했다.
그리고 강남에 중학교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논현,신중,신동,언주,도곡초등학교학생 모두가 영동중학교에 입학했다. 1969년에 양재여중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1972년에는 영동여자중학교, 1973년에는 남녀공학인 영동중학교로 바뀌었다. 1977년부터는 여학생이 강남으로 이전한 숙명여중과 신설학교인 진선여중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남학생만 선발했다. 개발 당시 전학생의 수급에 맞춰 여중에서 공학, 그리고 남중으로 바뀌고 학급수도 해마다 놀랍게 증가하곤 했다. 1978년에는 영동중학교 3학년은 한반에 70명씩 23학급으로 국내 최대의 학생 수를 기록했다.
당시 영동중학교에 가려면 신사동에서 버스를 타고 영동시장 앞, 제일생명 앞, 뉴욕제과 앞을 지나 그 다음인 영동중학교 앞이라는 정류장에서 내려야했다. 강남대로 주변에 건물이 없어 가장 상징적인 건물의 이름이 정류장 명칭이었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화려하고 복잡한 강남대로를 지나다 보면 지난 시절 한가하게 등하교 했던 그 시절이 오버랩 되곤 한다. 강남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화려하게 변해버린 도시가 아니다.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나와 함께 성장한 강남에 강한 동지의식을 느낀다. 
김득준(49세 이주2세대)

이희수리포터naheesoo@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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