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사람들/ 원로가수 손인호

노래에 실려 보낸 그리운 청춘

시니어들의 애창곡 ‘비 내리는 호남선’의 얼굴 없는 가수

지역내일 2010-12-19
대중가요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중가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문화영역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60년대 이전의 노래들은 유난히 음울하고 슬픈, 애절한 곡들이 많았다. 그 시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83) 선생. 1954년 작곡가 박시춘씨에게 ‘나는 울었네’, ‘숨 쉬는 거리’ 두 곡을 받아 크게 히트시킨 후 수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정작 그의 얼굴이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그의 긴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자.

50년 전 추억의 노래
‘잡는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는 그 사람아/ 너를 두고 짝사랑에 내 가슴은 멍 들었네/ 네가 잘나 일색이냐 내가 못나 바보더냐/ 아~ 속시원히 말을 해다오’

“이 노래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짝사랑’이라는 곡입니다. 같은 이름으로 여러 가수가 부른 노래들이 많지요. 예를 들면 고복수 선생과 한상원 선생의 ''짝사랑'', 주현미, 옥주현, 바블껌, 임성은의 ''짝사랑'' 등 말입니다.”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원로가수 손인호는 자신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50년 전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1957년도에 발표된 이 곡은 짝사랑을 하는 한 사람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을 왜 싫어하는지를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곡은 그 당시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는데 심지어 작곡가인 박시춘씨도 의외의 반응에 놀라 실감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손인호는 평안북도 창성 출생으로 본명은 손효찬이다. 어릴 적 수풍댐 건설로 고향이 물에 잠기자 중국 창춘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해방 후 맨몸으로 귀향해 갖은 고생을 하던 중, 때마침 열린 평양관서콩쿨대회에 출전해 일등을 차지했다.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던 그는 서울로 월남하여 KPK 악단에 들어간다. 이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단한 피난생활과 함께 군대에 입대해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분단과 실향의 아픔 노래로 달래
그는 “그 때 연예인들은 주로 육군 연예대에 편성돼 위문공연을 하러 다녔는데 입대 전 ‘공연 중 죽더라도 국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면서 노래는 피난생활의 서글픔을 달래주고 실의에 빠진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매개체였다고 회상했다. 휴전이 체결된 후에는 분단과 실향의 아픔을 담은 노래가 이어졌고, 이는 포화가 휩쓸고 간 폐허 위에 더욱 힘차게 뿌리내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손씨는 29세에 결혼을 하고 문공부 영화진흥공사 영화과에서 녹음기사로 일하면서 대한뉴스를 비롯해 많은 영화를 녹음했다.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노래실력 때문에 배우나 가수를 권유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끝까지 녹음기사를 고집했던 이유를 물으니 “딴따라라고 집사람이 반대했거든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라고 일축한다. 

그러다 우연찮게 박시춘씨에게 곡을 받아 취입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크게 히트를 쳤던 것. 그 후로 신세기레코드사를 거쳐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을 발표했고, 계속 ‘사랑 찾아 칠백리’, ‘하룻밤 풋사랑’, ‘이별의 성당고개’ 등을 히트시켰다. 1957년에는 도미도레코드로 이전하여 ‘짝사랑’, ‘물새야 왜 우느냐’, ‘이별의 부산항’, ‘청춘등대’, ‘향수의 블루스’, ‘남행열차’, ‘해운대 엘레지’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다.

팬클럽 결성, 제 2의 전성기 누려
그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맏아들인 손동준은 가수로 활동 중이다. 네 자녀들 가운데 아버지의 재능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손동준은 40대 중반에 늦깎이 트로트가수로 데뷔해 여러 장의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수의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아 지금은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면서 그래도 노래에 대한 미련과 열정은 떨쳐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한편 손인호씨는 “칠십이 넘어서까지 영화녹음작업을 했고, 일을 그만두니 여기저기서 찾는 사람이 생기고 KBS-TV 가요무대에 출연하면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열성팬들이 팬클럽까지 결성해 조촐한 모임을 갖고 있다며 “지방 팬들이 가끔 보양식품도 보내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즐거워했다. 현재 원로가수거목회, 만나리, 뿌리회 등 우리나라 가요발전을 위한 가수친목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는 “다리가 아파 걷는 것이 다소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옛날 그대로”라며 소장하고 있는 음반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낡은 LP판을 보며 감회에 젖는 그의 옆모습이 잠시 쓸쓸해 보였다.

사진 박찬웅(스튜디오 ZIP)
김선미 리포터 srakim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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