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면서 고유의 명절 추석 풍경도 좀 달라졌다. 이제 차례 상 번듯하게 차려놓고 조상님 모시려다 살아있는 자손끼리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부모 형제가 모처럼 모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오죽하면 집집마다 추석을 보내는 형편이 달라 이번 추석 어떻게 보내느냐고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을까. 그나저나 다른 집은 추석을 어떻게 지낼까?
이번 추석엔 여행갑니다~~
추석을 이용해 여행을 즐기는 가족들이 늘고 있다. 압구정동에 사는 서지원씨(38세)는 이번 추석을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보낼 예정이다. 남편이 바빠 여름휴가를 다녀오지 못했는데 추석 연휴가 10일이나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뉴질랜드행 항공티켓을 예약 했다고 한다. 다행히 초등생인 딸아이의 학교가 20일(월)과 24일(금)에 재량 휴업일이라 다소 긴 8박 9일의 스케줄을 잡을 수 있었다.
서씨 가족은 2년 전부터 음력 설날에만 명절을 쇠고 추석에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물론 시부모님들과 합의된 사항이며 대신 성묘는 추석 전에 미리 다녀온다고 했다. 지난해엔 시부모님과 남이섬 남이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서씨는 “최근에는 명절을 이용해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미리 성묘를 다녀오니 교통 체증도 없을 뿐더러 조상님께도 덜 죄송하고, 또 가족끼리도 휴식 같은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고 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지인의 집에서 머무를 예정이라 비교적 저렴하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어 다행이라면서 무엇보다 유난히 더웠던 우리나라의 여름을 잊고 겨울을 만끽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 여행 중엔 영화 ‘피아노’의 배경이었던 ‘카레카레 비치’와 유황 온천을 즐기고 가능하다면 남섬도 가 볼 계획이라고 한다.
청담동에 사는 이씨(37세) 가족은 이번 추석 연휴의 초반인 19, 20일에 가족들과 함께 1박 2일 동안 자라섬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아들만 둘인 이씨 가족은 평소에도 야외활동을 좋아해서 주말이면 양수리에서 수상스키를 즐기곤 했는데 캠핑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번 캠핑을 위해 SUV와 연결되어 원터치로 펼쳐지는 텐트와 바비큐 그릴, 해먹 등을 구입했다. 초등 3학년과 5학년인 두 아들은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들떠 있다면서 가족끼리 야외에서 바비큐도 하고 손전등 아래서 책도 볼 예정이라고 했다. 이씨는 “남자 아이들이라 커가면서 더 말이 없어지고 대화할 시간도 없어지는데 야외 활동을 자주 하다보면 가족 간에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씨 가족은 추석 차례를 지내고 시부모님과 함께 영화 관람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기정 리포터 kimkichoung@hanmail.net
외며느리의 첫 추석상 차리기
힘은 들지만 효도 하는 마음으로
서초동에 사는 양은영씨(44세)는 요즘 추석준비가 한창이다. 올해 처음으로 시댁에서 지내던 추석명절을 자신의 집에서 직접 주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양씨는 지난 설날에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가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한다.
“제가 외며느리에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기왕할 거면 시부모님에게 점수라도 따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음 명절부터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내심 힘든 일을 자초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양씨의 제안에 시부모님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하며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씨는 막상 추석이 가까워지자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차례 격식을 갖추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례상, 병풍, 제기에 명절 선물, 명절 음식까지 생각할수록 깜깜하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인터넷을 통해 명절 상차림부터 꼼꼼히 체크하며 공부중이다.
양은영씨의 친가와 본가는 모두 제주도이다. 독자인 남편의 입장 때문에 결혼 후 10년 이상을 매해 추석과 설날이면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엔 친정 식구들 보고 싶은 생각에 여행가방 챙기는 게 즐거웠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명절이 가까워지면 비행기 왕복항공권에 시부모님 용돈, 친정부모님 용돈, 가족들 선물까지 챙기다 보면 1백만 원이 모자랐다.
“저희만 바라보고 사시는 시부모님께 경비가 많이 든다고 안 내려가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더라구요. 나중에는 으레 내려가는 연중행사가 됐어요.”
그렇다고 제주가 고향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마다 명절에 고향을 찾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경비가 많이 드는 탓에 잘 가면 1년에 한 번 정도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그래도 세계적인 휴양지인 제주도에 내려가서 여행도 즐기고 좋지 않느냐고 양씨에게 물었다. 물론 제주에 가면 바다도 보고 맑은 공기도 마실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명절 연휴를 이용해 간 것이고 명절 음식 준비하다 보면 언감생심 여행은 좀체 쉽지 않다고 한다.
“남들은 명절에 제주 간다면 부러워해요. 전 그야말로 명절 내내 음식 만들고 설거지만 하다 옵니다.”
올해부터는 역으로 제주에서 서울로 시부모님이 아들네로 오신다. 차례상 차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고. 이번 추석엔 시부모님이 추석 연휴 기간인 2박 3일 동안 머물다 갈 예정이다. 양씨는 요즘 남편이랑 시부모님 모시고 연휴 기간에 뭘 하면 좋을지 상의중이란다. 아마도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과 경복궁을 둘러보며 3대가 어울려 오랜만에 민속놀이나 즐겨볼 참이라고. 양씨는 남편이 오랜만에 아들 노릇하게 됐다며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참 잘 한 것 같다고 말한다.
One-Stop 쇼핑으로 추석 음식 준비 끝
가사 스트레스 벗고 ‘일하는’ 명절을 ‘즐기는’ 명절로 바꾼다
대치동에 사는 45세 주부 K씨는 작년부터 명절만 앞두면 슬슬 찾아오던 우울증세가 사라졌다. 외며느리인 K씨는 재작년까지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먹을 온갖 음식을 직접 준비해서 시댁을 찾았다. 명절 3~4일 전부터 시장을 보기 시작해 명절연휴 전날이면 음식준비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요리 솜씨가 없어 스트레스는 더 컸다. 지친 몸으로 마련한 음식을 들고 찾아간 시댁에서는 식사 때마다 상차림과 설거지 등 또 다른 가사노동의 연속, 그렇게 보내는 명절연휴가 즐거울 리 없었다. 당연히 그 스트레스는 남편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명절 증후군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K씨가 작년부터 생각을 바꿨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음식을 준비하며 힘들어하고 우울해하느니 비용은 좀 들더라도 가까운 상가에서 One-Stop 쇼핑으로 해결키로 한 것이다. 그동안 ''가족들이 먹을 음식인데 성의 없이 사온다''는 말을 들을까 염려돼 피곤과 스트레스를 무릅쓰고 직접 준비했었는데, 나이가 드니 느는 게 배짱이라고 작년에는 추석 전날 아침 일찍 인근 상가를 찾았다. 미리 예약해둔 떡과 전을 사고, 두세 가지 국과 식혜, 밑반찬과 몇 가지 요리, 과일 등을 30여분 만에 준비할 수 있었다.
준비한 음식을 들고 배짱 반 걱정 반으로 들어선 시댁에서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그동안 시어머니도 며느리가 혼자서 힘들게 음식을 준비해 오는 것이 안쓰럽고 미안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디서 이렇게 예쁘게 잘 만든 음식들을 사왔니? 앞으로 힘들게 만들 필요 없이 이렇게 준비하면 되겠구나"하셨다. 사서 준비한 음식이 100% 흡족하지는 않겠지만 며느리 입장을 헤아려주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K씨의 시댁은 큰 집이 아니라서 차례를 지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석이면 출가한 시누이들의 가족들이 모두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명절 준비로 지쳐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밝은 얼굴을 보일 수 없었다던 K씨는 이제 가사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즐기는 명절이 되니 다가오는 올 추석도 기다려진다고 한다.
이선이 리포터 sunnyyee@dreamwiz.com
하루 종일 먹다가 끝나지만 그래도 행복해~
대치동에 사는 이현선(47)씨는 2남 4녀의 맏며느리로 시어머니를 비롯해 형제 조카가 모두 이씨의 집에 모여 추석을 보낸다. 천주교우인 이 가족들은 추석 아침 미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차례를 대신한다. 15년 전에 홀로 되신 시어머니가 큰 아들에게 집안 대소사를 넘길 때부터 그렇게 했다.
미사 후에 가족들은 먹고 또 먹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며느리들은 먹을 것을 장만하느라 부엌에서 바쁘고 조카들은 한 방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운다. 또 사위나 아들은 사이사이 빈 방에서 조용히 낮잠을 자기도 한다.
차례는 지내지 않지만 추석 음식인 토란국도 해먹고 송편도 빚는다. 추석 오후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각자 개성에 맞게 모양을 만들어 즉석에서 쪄먹는 송편 맛은 유명한 떡집 송편도 저리가라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김없이 캐나다와 호주에 살고 있는 시누이에게 전화가 온다. 명절답게 서로 안부도 묻고 그리움도 전한다. 웬만하면 저녁 식사 후에 달이 훤히 떠 있을 때까지 ‘하하 호호’하며 텔레비전도 함께 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함께 모여 정 나누고 추억 만들어
이 가정은 매년 특별한 이벤트 하나 없이 먹기만 하는 추석을 보낸다. 하지만 명절에 가족이 모여 잘 먹고 서로 정을 나누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을까.
그러면서 이씨 아이들이나 조카들은 할머니 고모나 고모부, 큰 아버지와 큰 엄마, 작은 아버지나 작은 엄마와 어울리며 가족의 의미도 배우고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도 만든다. 몇 년 전에 이씨의 동서와 조카들은 캐나다에서 2년간 유학하고 있던 시절에 있었다. 그때도 추석에 송편을 만들어 먹으면서 내내 큰 집에서 온 가족에 모이던 추석이야기하며 다음 추석엔 서울에 꼭 가자고 결의를 했다고 한다.
이씨는 앞으로 조카들이 결혼해 배우자를 따라 시댁으로 처가로 가야하는 날이 오면 추석 풍경도 달라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때는 그때고 올 추석도 여전히 함께 모인다. 고3 수험생 조카도 공부를 잠시 미루고 꼭 올 것이다.
이희수리포터 naheesoo@dreamwiz.com
중간고사 앞둔 아이 때문에 귀성 포기
결혼 후 20여년 가까이 명절 때마다 귀성대열에 합류했던 주부 정 모(44, 서초구 잠원동)씨. 유학 중인 큰 아이가 어릴 때만 해도 본격적인 귀성이 시작되기 3~4일 전에 미리 아이와 둘이서 시댁을 찾았었다. 둘째가 태어난 후부터는 온 식구가 함께 승용차로 귀성길에 뛰어 들었는데 칭얼대는 작은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고 귀저기를 갈아주면서 동시에 장시간 차안에 갇혀있는 것이 답답해서 날뛰는 큰애를 어르고 달래면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명절만 닥치면 으레 떠나야하는 길인 양 고생을 마다않고 나서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 때는 남편만 부모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둘째 아이의 중간고사가 추석 연휴 바로 다음 주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비록 요즈음에는 고속도로 사정이 나아져 예전만큼 귀성길이 힘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7~8시간은 걸리는 편이라 한 번 다녀오면 아이가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시는 시부모님의 이해로 쉽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는 공부하고 엄마는 독서삼매경에 풍덩!
다행히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인 친정 여동생도 같은 처지라 의기투합했다. 우선 한 집에 모여 추석을 맞기로 하고 송편과 전 등 명절 음식도 조금씩 준비하기로 했다. 명색이 명절인데 공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복원된 광화문도 둘러보고 외식도 할 계획이다.
같은 학년인데다 둘 다 특목고 진학을 목표로 내신 챙기기에 중점을 두고 있어 함께 공부하면 은근히 경쟁효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연휴 기간 동안에는 구립독서실도 모두 휴관해 꼼짝없이 집에서 공부를 해야 할 상황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엄마들은 그동안 여유가 없어 손을 놓고 있었던 책 읽기에 푹 빠져볼 참이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적어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양쪽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확보해두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아이와 함께 찾아뵙지 못해 시부모님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며느리로서 참으로 오랜만에 편하게 명절을 보내는 여유를 마음껏 즐겨볼 요량이다.
장은진 리포터 jkume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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