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약이 있다면 오늘날 가장 잘 팔리는 약품이 될 것이다. 이는 입시생이나 학생들만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한창 일하는 성인들은 물론 노인들까지도 모두 기억력이 나아지기를 절실하게 원한다. 기억력만 좋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까?
기억력이 좋으면 모든 것이 더 나으리라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때로는 잊지 못해 삶이 더 힘들어 질 수도 있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살아오는 동안 겪은 모든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속상하고, 화나고, 답답한 일들을 조금도 잊지 못하여 늘 전전긍긍하며 평생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과음의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억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인 수가 흔하다. 과음하고 난 다음날 소위 필름이 끊겨 전날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때 얼마나 불안하고 곤혹스럽겠는가?
Y씨는 만취한 다음날 깨어보니 몸에 마른 핏자국이 여기저기 범벅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리저리 몸을 훑어보아도 아무런 상처 자국이 없자 그것이 남의 피일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섬뜩해졌다. 혹시 ‘취중에 시비를 벌이다 누군가를 해친 것이 아닐까?’ ‘혹시 살인이라도 저질렀다면···’전화 받는 것도 두려워 배터리를 빼놓고 꼼짝 않고 들어박혀 지냈다. 일주일쯤 지나도 아무런 일이 없어서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없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겨 기억이 나지 않을 때마다 마음 졸이며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되던가? 혹시 큰 실수를 저질렀을까 두려워 그날 술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지만 대놓고 물어 보지도 못한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말을 걸지도 못 하고 조심스럽게 눈치만 살핀다. 아무 말이 없으면 추태를 벌인 것은 아닌지 신경이 곤두선다. 얼마간 더 시간이 지나도록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그때서야 조금씩 마음이 놓인다. ‘기억만 할 수 있다면 사과할 것 사과하고 벌어진 일을 빨리 빨리 수습하면 될 텐데’하는 생각이 사무친다.
과음을 하고도 기억이 온전하여 과음한 뒤끝의 실수도 일어난 그대로 끝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경각심이 생겨 음주를 자제하는데 퍽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을 잊겠다고 폭음한 터에 온전한 기억을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가 아니겠는가?
신 정호 (연세 원주의대 정신과 교수, 강원알코올상담센터 소장)
무료 상담 : 강원알코올상담센터 748-5119 http://alja.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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