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26개 민족 대표는 푸얼지구 전 지역 동포를 대표해서 이곳에 모여 소를 잡고 정안수를 마시며 끝까지 일치단결하기로 서약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영도 하에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할 것을 여기에 서약하노라. 푸얼지구 제1차 형제 민족 대표회의 1951년 원단.”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었으니 정확히 14개월 후의 일이다. 건국 후 중국이 소수민족을 중국이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모으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요, 증거인 셈이다. 중국에 공산 혁명이 성공하고 정부가 수립된 뒤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바로 변방 소수민족의 이탈을 막기 위한 한화(漢化)작업이었다. 박물관 내부에는 주로 근대 푸얼현의 변모와 관련된 자료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역사박물관에서도 기대했던 푸얼의 옛 영화를 찾기 보기는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전시실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공산당의 노력과 이 지역의 공산화 과정, 소수민족의 현황 등 근대기의 모습만이 소개되어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 옛 푸얼성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1887년 프랑스 화가의 그림 한 점을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외국에서 발견 되어 복사해온 것이란다. 이층 삼층의 기와집으로 빼곡한 성내를 자그만 성곽이 품어 안고 있다. 성 밖엔 저수지와 농지가 있는 평화롭고 윤택해 보이는 마을 모습이다.
푸얼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뚱산(東山)에 올랐다. 이젠 중국의 어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현대화 되어버린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박물관에서 만났던 옛 성곽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 옛 모습을 복원해 보려했지만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기준점을 찾을 수가 없다. 뚱산의 정상에는 최근 새로 보수했다는 서역풍의 문필봉(1816년)이 서있고 산등성을 타고 다시 차마고도의 옛 길이 이어져 있다. 이름하여 관마대도(官馬大道)다. 윈난성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여래 갈래 중 가장 대표적인 길로 바로 이곳 푸얼에서 쿤밍과 내륙의 여러 성(省)을 거쳐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가는 길이다. 소위 황제에게 올리는 푸얼공차(貢茶)를 나르던 길이다. 지금의 도로가 뚫리기 전 이 길은 유일하게 북쪽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단다. 관마대도는 차마고도가 글자의 의미만 새겨 ‘차와 말의 교역로’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관마대도는 차와 말뿐 아니라 모든 교역물자를 실어 날랐던 길이고 외부와 소통하던 문명의 이동로이었던 것이다. 남만(南蠻) 오랑캐의 땅과 중국의 수도를 연결하며 소수민족과 한족 간의 문명교류를 담당했던 길, 그 길엔 이제 그 옛날 빈번히 오갔던 마방(짐꾼)들의 말방울 소리는 간 데 없다. 집을 떠나 천리를 가는 마방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가슴을 에는 슬픈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들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 많은 사연을 보고 들었을 고도(古道)의 초라한 길목을 푸르른 대나무 숲과 허물어 가는 기와집, 그리고 한 줄기 바람만이 외롭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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