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희생자 합동위령제 지내 … ‘원수 집안’ 결혼
“피비린내나는 복수가 대물림 돼서는 결코 안된다. 후대에게 용서와 화해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합동위령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우익 만행 때문에 혈육 262명을 잃은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 주민들이 합동위령비 건립에 나섰다.
구림마을의 비극이 시작된 건 60년 전인 1950년 10월 경찰이 공비토벌작전 때 민간인 44명을 사살하면서부터다. 피를 부르는 비극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군경과 빨치산이 점령할 때마다 주민들이 처참히 죽어갔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이적행위’를 했다.
보복의 악순환은 결국 마을 주민 26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의 총성은 멈췄으나 부모와 형제를 잃은 적개심이 마을을 휘감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주민들을 억눌렀다.
불행중 다행이었을까. 별다른 마찰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침묵으로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누나를 잃었던 최재상(72)씨는 아픈 과거에 대해 “지금까지 다른 사람한테 누나를 죽인 경찰이 누구인지 한 번도 얘기해 본적이 없다. 얘기를 꺼냈다면 마을 전체가 불행해졌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친인척으로 얽혀있는 마을 특성도 분노를 억누르데 일조했다. 1960년대 중반쯤 주민들 사이에 작은 화해가 시도됐다. 좌우익에게 부모 형제를 잃은 집안 사이에 결혼이 이뤄졌다. 유교적 전통이 온전히 남아있던 상황에서도 ‘원수 집안’끼리 사돈을 맺었다.
전쟁의 상흔이 되살아날 위기도 있었다. 1970년대 군사정권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화해의 진전은 어려워 보였다. 1976년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순절비가 만들어졌다. ‘반쪽짜리’ 위령비의 건립으로 군경에 희생된 집안은 숨을 죽이면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침묵 속에서 또다시 용서와 화해에 나섰다. 500년 이상 유지해 온 대동계를 통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협력,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마을 역사를 연구하는 ‘구림지’ 편찬도 주민들이 단합하는 계기가 됐다.
주민들의 노력은 2002년 독립기념탑 건립 때 결실을 맺었다. 3억원이 넘는 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합동위령비 건립추진위 사무국장 정석재(62)씨는 “구림마을이 3·1운동의 영암군 거점이었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독립기념탑 건립 때 큰 힘을 보탰다”라고 설명했다.
화해의 물결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본격화됐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가 구림마을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위원회는 이듬해 경찰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44명의 명예회복을 결정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44명의 명예회복 대신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포함해 262명의 합동위령제를 선택했다. 정 사무국장은 “44명의 명예만 회복될 경우 또다른 마찰이 생길 것 같아 거절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주민들은 또 ‘용서와 화해’의 상징인 합동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치유한 마을의 아름다운 화해과정이 알려지자 학계와 외신이 구림마을 주목했다.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으로 치달으면서 구림마을의 화해가 돋보였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좌우익의 만행으로 찢겨진 마을공동체가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외신인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IHT)도 지난 2008년 아름다운 화해의 과정을 현지 기사로 타진했다.
합동위령비 건립추진위 부회장 현삼식(63)씨는 “좌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들이 국가의 혼란 때문에 학살됐다”며 “합동위령비는 복수가 복수를 낳은 역사의 단절을 의미한다”라고 추진 배경을 밝혔다.
방국진 기자 kjbang1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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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나는 복수가 대물림 돼서는 결코 안된다. 후대에게 용서와 화해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합동위령비 건립을 추진 중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우익 만행 때문에 혈육 262명을 잃은 전남 영암군 구림마을 주민들이 합동위령비 건립에 나섰다.
구림마을의 비극이 시작된 건 60년 전인 1950년 10월 경찰이 공비토벌작전 때 민간인 44명을 사살하면서부터다. 피를 부르는 비극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군경과 빨치산이 점령할 때마다 주민들이 처참히 죽어갔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이적행위’를 했다.
보복의 악순환은 결국 마을 주민 26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의 총성은 멈췄으나 부모와 형제를 잃은 적개심이 마을을 휘감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주민들을 억눌렀다.
불행중 다행이었을까. 별다른 마찰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주민들은 이 과정에서 침묵으로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누나를 잃었던 최재상(72)씨는 아픈 과거에 대해 “지금까지 다른 사람한테 누나를 죽인 경찰이 누구인지 한 번도 얘기해 본적이 없다. 얘기를 꺼냈다면 마을 전체가 불행해졌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친인척으로 얽혀있는 마을 특성도 분노를 억누르데 일조했다. 1960년대 중반쯤 주민들 사이에 작은 화해가 시도됐다. 좌우익에게 부모 형제를 잃은 집안 사이에 결혼이 이뤄졌다. 유교적 전통이 온전히 남아있던 상황에서도 ‘원수 집안’끼리 사돈을 맺었다.
전쟁의 상흔이 되살아날 위기도 있었다. 1970년대 군사정권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화해의 진전은 어려워 보였다. 1976년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순절비가 만들어졌다. ‘반쪽짜리’ 위령비의 건립으로 군경에 희생된 집안은 숨을 죽이면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침묵 속에서 또다시 용서와 화해에 나섰다. 500년 이상 유지해 온 대동계를 통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협력,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마을 역사를 연구하는 ‘구림지’ 편찬도 주민들이 단합하는 계기가 됐다.
주민들의 노력은 2002년 독립기념탑 건립 때 결실을 맺었다. 3억원이 넘는 돈을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합동위령비 건립추진위 사무국장 정석재(62)씨는 “구림마을이 3·1운동의 영암군 거점이었다”면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독립기념탑 건립 때 큰 힘을 보탰다”라고 설명했다.
화해의 물결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 본격화됐다.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회)’가 구림마을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위원회는 이듬해 경찰이 무고한 민간인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44명의 명예회복을 결정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44명의 명예회복 대신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포함해 262명의 합동위령제를 선택했다. 정 사무국장은 “44명의 명예만 회복될 경우 또다른 마찰이 생길 것 같아 거절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주민들은 또 ‘용서와 화해’의 상징인 합동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치유한 마을의 아름다운 화해과정이 알려지자 학계와 외신이 구림마을 주목했다.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으로 치달으면서 구림마을의 화해가 돋보였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좌우익의 만행으로 찢겨진 마을공동체가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외신인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IHT)도 지난 2008년 아름다운 화해의 과정을 현지 기사로 타진했다.
합동위령비 건립추진위 부회장 현삼식(63)씨는 “좌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들이 국가의 혼란 때문에 학살됐다”며 “합동위령비는 복수가 복수를 낳은 역사의 단절을 의미한다”라고 추진 배경을 밝혔다.
방국진 기자 kjbang1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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