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내 디지털도서관이 작년 5월 개관한 이래 어느덧 1주년을 맞았다. ‘누구에게나 열린 정보제공의 실현’을 목표로, 고객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래지향적 디지털 복합문화공간이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 부임한 모철민(52) 관장은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정보격차 해소에 최우선 순위를 두면서 동시에 국립중앙도서관을 세계적인 도서관으로 육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디브러리’를 아시나요?
국가포털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 모두가 언제 어디서나 신뢰할 수 있는 최고의 지식정보를 쉽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도서관도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며, 디지털과 라이브러리를 합친 ‘디브러리’가 이를 가능케 한다.
국립디지털도서관은 지상 3층, 지하 5층, 연면적 3만8천14㎡의 규모에 40만점의 디지털화된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 지하 1층은 지식의 길을 통해 디지털북카페와 중앙도서관 본관이 연결된다. 지하 2층에는 디지털열람실, 미디어센터, 도움누리터, 복합상영관, 세미나실 등이 있다. 그리고 지하 3층에는 디지털조형물이 설치된 로비와 디지털신문대, 다국어정보실, 전시실, 대회의실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매일 1000명 이상의 이용자가 방문하여 미디어 도서관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고 말문을 여는 모 관장은 도서관도 디지털혁명에 적응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얼마 전 스마트 폰을 구입했다고 한다. 스마트 폰에 도서관 자료를 제공하면 정보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과거에는 국민들 사이에서도 정보의 격차가 심했다. 우선 정보 양극화 축소를 목표로, 모든 정보를 디지털화해서 한반도 땅 끝까지 전달하겠다”면서 “무엇보다도 정보소외계층을 없애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통합대출서비스 실시와 정보격차 최소화
국립중앙도서관 본연의 임무는 서지정보 구축이다. 160명 사서들의 역할이 서지정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 관장은 서지정보 구축만은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으로 전문사서 33명을 선출해 ‘국가서지정보센터’에 투입했다.
또 몇 년 전부터 동네마다 작은 도서관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 소규모 도서관은 소장 자료 부족은 물론 특히 디지털자료가 취약한 것이 문제였다. 이에 대해 모 관장은 “동네 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을 연결하여 취약점을 보완해 나가겠다”고 의지를 표명했다. 그 일환으로 지난달 경북 칠곡군에 첫 자료교류 도서관을 개관했다. 이 도서관의 소장 자료는 1000여권에 불과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도서자료 교류로 30만권의 디지털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연말까지 작은 도서관 1000여개를 선정해 디지털정보 이용에 따른 저작권료를 전액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또 “이용증 하나로 전국의 공공도서관에서 도서를 대출하고 반납할 수 있는 통합대출서비스를 실시할 것”이라며 “이렇게 될 경우 타 지역에서 빌린 책을 서울에서 반납할 수 있게 돼 도서관 이용이 더욱 편리해진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오는 10월부터 2개 지역에서 이와 같은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운영한 뒤 전국 700여개 공공도서관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책 멀리하는 청소년들 안타까워
“당신은 책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곳이며 그 세계는 책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다. 모 관장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청소년기에 도서관을 찾기 보다는 학원으로 직행해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독서를 통해 세상을 배우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고우영의 어린이 삼국지와 50권짜리 세계명작전집을 끼고 살았어요. 달리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느 때는 밤을 새워 읽기도 했는데 그때 책 속에서 얻었던 느낌이나 단상들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지요” 그 후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대학시절에도 그는 좋은 책들을 벗 삼아 울적했던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다 첫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7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모 관장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거쳐 미 오리곤 대학에서 관광학을 공부했다. 지난 94년 문화관광부 관광국 국제관광 분야를 시작으로 프랑스 한국문화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문화, 관광 분야의 전문가로 오늘에 이르렀다.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는데 파리에서 생활하던 시절, 아내와 딸에게 못했던 남편과 아빠역할을 그나마 할 수 있었다”면서 그 당시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분위기여서 딸아이 하나만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외로움을 타는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많은 5월이어서 일까. 파리에서 디자인계통의 일을 하는 딸이 무척 보고 싶다는 그의 눈가엔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정이 가득하게 피어올랐다.
사진 박경섭 (studio ZIP)
김선미 리포터 srakim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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