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특집 - ‘효(孝)’를 말하다

여흥민씨 삼세칠효(三世七孝), 효의 근본을 가르치다

민 평·민 환 형제 이후 3세에 걸쳐 7효자 배출 … 도룡동에 효자정려 남아 효의 산실 역할

지역내일 2010-05-05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대덕초등학교 앞에는 고풍스런 한옥이 있다. 바로 여흥민씨(驪興閔氏) 집의공 민충원 재실(齋室)이다. 재실의 솟을대문 왼편에는 정려각 네 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 정려각에는 삼세칠효(三世七孝)로 유명한 민 평과 민 환의 쌍효자 정려와 민삼석의 정려, 민병갑의 처 남양 홍씨의 효열부비가 모셔져 있다. 이 정려들은 효도와 우애, 정절의 미덕을 새삼 깨우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3대 걸쳐 7명의 효자 연이어 배출


대전은 첨단 과학문화와 선비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대덕연구단지와 카이스트는 한국의 과학문화를 대표한다. 한편 박팽년, 송시열, 송준길, 권 시 등 조선시대의 유학자들과 그들이 남긴 문화유산은 대전이 탁월한 선비문화의 고장임을 말해 주고 있다.


선비문화의 상징적 정신은 충효(忠孝)정신이다. 이 충효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가문이 바로 도룡동 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여흥민씨 집안이다. 이 집안이 행한 충효의 실상이 잘 나타나있는 책이 『여흥민씨 오세충효록(五世忠孝錄)』이다.


이 책은 여흥민씨 18세(世)인 민여검, 그 직계후손인 19세 민 평과 민 환 형제, 20세 민광민, 21세 민경중, 22세 민진운 등 오대에 걸친 충효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효를 실천한 정도가 훌륭한 사람에게 정려문(旌閭門)을 내리거나 은전(恩田)과 증직(贈職)으로 포상했는데 민여검(閔汝儉 1564~1627)의 후손들은 5대에 걸쳐 계속 포상을 받은 것이다.


특히 여흥민씨는 삼세칠효로 유명하다. 3대에 걸쳐 무려 7명의 효자가 연이어 배출되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민 평(閔枰 1582~1646), 민 환(閔桓 1594~1628) 형제와 민 평의 아들 민광신(閔光晨 1615~1684), 민광민(閔光旻 1622~1701)형제 및 민광민의 아들 민원중(閔元重 1646~1711), 민경중(閔慶重 1650~1729), 민응중(閔應重 1653~1691)을 일컫는다. 여기에 민경중의 부인 창령성씨(昌寧成氏)를 추가해 삼세팔효라고도 한다.




 민여검으로부터 대전 세거 시작돼


여흥민씨가 대전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13세인 민충원이 자신의 어머니 묘를 도룡동 호동마을에 정하면서부터다. 그 후 본격적으로 세거(世居)를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민여검이 정착하면서부터다. 이 내용은 공주읍지(公州邑誌) 민여검조에 ‘비로소 유성 경운에 살기 시작하였다(始卜居儒城慶雲)’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여흥민씨의 본격적인 대전 세거는 민여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 지역의 민씨들은 사실상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세칠효도 모두 그의 직계후손이다. 민여검은 선조 22년인 1589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1613년(광해군 5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승문원)에 있을 때 권신 이이첨 등에 밉보여 10년간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민여검은 1623년 인조반정 초에 곽산군수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그 후 울산부사로 복직되었고 전공을 인정받아 1626(인조 4년)년에는 종2품 가선대부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27년 호패법의 명부를 기일 내에 작성하지 못한 죄로 서울로 송환된다. 송환도중 정묘호란이 일어나 여러 요새가 함락되고 임금이 강화도에 피난하는 등 굴욕을 겪다가 화의(和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국충정의 울분 끝에 충북 괴산에서 병사했다.


민여검은 풍모가 뛰어나고 성품이 깨끗했으며 일생을 오직 충의와 애민으로 일관하였다. 이런 충성심과 치적을 인정받아 품복(品服)을 특사 받았다. 그의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는데 신도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송시열의 5대손 송환기가 썼다.


이 같은 민여검의 성품은 후손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두 아들인 민 평과 민 환이 효자로 이름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뒤로도 3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줄을 이었다.




 효자집안에 효자난다


하지만 여흥민씨 가문의 충효 전통은 민여검의 선대(先代)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여검의 할아버지는 입암공 민제인(閔齊仁)이다. 민제인은 벼슬이 좌찬성까지 오를 만큼 화려한 관직생활과 더불어 문학적 재능 또한 비범해 이른바 사장학(詞章學)에 능통했다. 그의 문집인 『입암집』에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실려 있다.


민제인은 특히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이기도 하다. 『동몽선습』은 오륜(五倫)의 뜻을 풀어 써 아이들을 가르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민제인이 이 책을 통해 후세들에게 가르친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으로 유학의 기본정신을 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면면히 이어진 여흥민씨 가문의 충효정신은 삼세칠효에서 꽃을 피운다. ‘효자집안에서 효자난다’는 말이 사실로 나타난 것.




 호랑이도 감복한 효성


삼세칠효는 민여검의 장남 민 평으로부터 시작한다. 민 평은 어머니가 질병에 걸려 위중하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어머니께 드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간 시묘(侍墓)를 했다. 구전에 따르면 이때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민 평은 “너는 동물의 왕이니, 내가 죄가 있다면 나를 해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서 내가 무덤을 지키게 하라”고 호통을 치자 달아났다고 한다.


조선 예학(禮學)의 대가 김장생은 그의 효심과 효행에 대해 ‘누구도 민 평의 예(禮)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감탄하며 문인록에 그의 이름을 수록했다. 또한 송시열은 민 평의 묘갈명(墓碣銘)에서 ‘민 평은 마음이 도탑고 성실한 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했다.


민 평은 이 같은 효행으로 1665년(현종 6년) 호조정랑으로 증직되었고 숙종은 1688년(숙종 14년) 정려를 내려 그 덕을 기렸다.


민 환은 민 평의 동생이다. 민 환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일체의 반찬과 장을 거절하고 미음만 먹으면서 3년상을 치렀다. 아버지가 위중할 때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렸다. 아버지 3년상도 미음만으로 버티며 슬퍼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3년상을 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묘갈도 우암 송시열이 지어 그를 기렸고, 숙종은 1700년(숙종 26년)에 효자정려문을 내리고 통정대부 좌승지로 추증했다. 그의 정려는 현재 도룡동에 형인 민 평의 정려와 나란히 있는데 이를 쌍효정려라고 부른다.




 효의 정신 되새기는 계기 마련돼야


민광신과 민광민 형제는 하체가 마비된 아버지 민 평을 평생 헌신적으로 모셨다. 또한 이 형제는 함께 40년을 같은 집에서 살며 화목과 우애를 지켰다. 이들의 효행과 우애는 송시열도 감동케 했다. 송시열은 그가 지은 민 평의 묘갈문에서 ‘광신과 광민의 화목과 우애가 보통 사람들 보다 뛰어나 내가 기꺼이 벗을 삼았다’고 쓰고 있다.


민광민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원중, 경중, 응중이 삼세칠효의 맥을 이었다. 이 세 형제들도 어머니의 병환이 극심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드렸다. 이들 또한 형제들이 모두 한 마을에 살며 각별한 우애를 보였다. 선대(先代)로부터 전해지는 가문의 전통이 이들의 효행과 우애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민 환의 10세손인 민강식씨(대전 서구 상가연합회장)는 “효도는 자기 자신의 어진 마음씨와 태도로, 자식이 마땅히 부모에게 드러내는 도리”라며 “요즘은 효에 대한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고리타분하다는 인식마저 있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또한 그는 “삼세칠효는 대전의 뿌리를 찾고 효의 정신을 되새기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며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 한번 효의 근본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윤덕중 리포터 da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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