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마비를 앓던 소년이 있었다. 천형과도 같던 질병은 그의 일상을 옥죄었다. 지금보다도 장애인들의 삶이 팍팍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처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그리고 그 꿈을 키워나갔다. 남들보다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소년은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꿈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 열심이다.
자해한의원 구자권 원장(50)은 개원 21년째를 맞는 베테랑 한의사다. 1989년 대전대 한의학과를 졸업하면서 개원한 후 줄곧 대전을 지켰다.
1994년 모 공중파 방송에서 그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 프로그램이 다룬 최초의 한의사였다. 모든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항상 연구하는 그의 모습에 한의원은 환자들로 넘쳐났다.
구 원장은 “좋은 의사는 환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까지도 해소해 줄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들에게 세심히 다가가야 하고 의학적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속칭 잘 나가는 한의사였던 그는 2000년 9월 홀연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리고 3년,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는 “환자들이 몰리면서 내 자신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행위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2003년 대전에 다시 돌아온 그는 더 넓은 크기의 그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의원은 여전히 잘 됐다. 하지만 구 원장의 활동범위는 한의원 바깥으로까지 넓어져 있었다.
2005년 국제휠체어농구대회를 대전에서 개최하는 데는 그의 힘이 컸다. (사)대전·충남 장애인 재활협회 회장,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대표이사, 대한장애인골프협회 대전시협회장, 경희대 겸임교수 등 그의 봉사활동과 사회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그가 최우선에 두고 있는 부분이다.
공주의 한 시골교회 교인들은 그를 ‘담임목사님’으로 부른다. 그는 2007년 목사안수를 받고 2008년부터 목회활동을 시작한 현직 목사님이다. 부임 당시 15명이었던 교인들도 7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목회활동에 대해 “시골 노인분들의 신앙생활을 돕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고, 그 부르심과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 응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그는 연년생인 첫째와 둘째 자녀가 연달아 민족사관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전국의 학부모들은 그 비결을 궁금해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해질 수 있고, 잘하는 걸 하면 세계 최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죠. 따라서 ‘먼저 좋아하는 걸 해라, 그 다음 잘하는 걸 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순 없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 주었죠.”
또한 그는 “아이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공부든 운동이든 인생사든 순리를 벗어나 억지로 하는 것은 병이 되기 때문이란다.
윤덕중 리포터 da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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