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웃들의 밥·일·꿈

중소기업청 해외시장과 김유숙 과장

일, 사랑, 아이들…그리고 꿈, 내 인생의 키워드

지역내일 2010-03-07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요람 대덕연구단지에서도 부부연구원은 그리 흔치 않다. 중소기업청 해외시장과 김유숙 과장은 미국유학을 다녀 온 부부연구원 출신이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선임연구원이던 그는 2003년 7월 대전시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수상하는 등 연구원으로서도 성과를 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을 꿈꾼 그는 2005년 대전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를 거쳐 2007년 5월 중소기업청 국제협력팀장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생 쉰 살. 연구원 출신의 공무원, 사회적 성취를 이룬 워킹맘.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글 : 윤덕중 리포터 dayoon@naeil.com


중간제목 : 김유숙, 나의 일을 말하다
그와의 만남은 그리 쉽지 않았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설을 며칠 앞둔 지난 10일, 그에게 전화를 했다. 인터뷰 약속은 일주일을 넘겨 17일 오후 2시로 잡혔다.
17일 오후 1시 20분쯤, 마침 공주에서 인터뷰가 있었던 터라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연락이 왔다. 예정에 없던 급한 회의가 생겼단다. 오후 5시로 약속은 연기됐다.
오후 5시, 그는 자리에 없었다. 계속되는 회의. 다시 약속은 다음 날 오후 2시로 연기됐다. 그렇게 그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물었다. 쉰 살의 그에게 일은 무엇이냐고.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고 깨어있게 하는 것, 나 자신이나 가족이라는 협소함에서 벗어나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의무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바쁘다.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을 도와주는 일이 그가 맡은 일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300만개에 달한다. 그중 해외시장에 물건을 파는 수출기업은 7만7000여개. 수출이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더 많은 기업이 수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김유숙 과장의 생각이다.
“기술력도 있고 해외시장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자금이나 경험, 정보 등이 없어서 해외시장으로 나가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이 많아요. 이들에게 시장조사나 자사브랜드 개발 지원, 해외민간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 해외인증획득 지원사업 등을 통해서 수출기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맞춤형 지원사업을 펼치는 것이 저희 업무죠.”
지난 해 7000여개 기업을 지원했다. 올해는 더 많은 기업에 도움을 줄 계획이다. 언뜻 들어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볼 때 공무원이라면 정년보장이 되고 신분이 안정되어 있으니까 마냥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죠. 하지만 저희 부서만 해도 야근은 기본이고 밤샘 근무하는 날도 많아요.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를 적당한 시기에 적절한 정책을 펼쳐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하긴 중소기업청만 해도 300만개에 달하는 중소기업의 이해와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그래서 그는 말한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 하지 말라”고. 정책 하나를 만들고 시행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민하고 중압감을 느끼며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려야 한다. 하지만 또 바로 그 점이 공무원의 매력이란다. 그 속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보람’, 그것이 그가 말하는 ‘나의 일’이다.


중간제목 : 나의 삶터, 대전을 말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화장품회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이었던 남편과 1985년 결혼하면서 대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1987년 미국유학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1994년 대전에 돌아 온 그는 지금까지 대전의 일터에서 일하며 대전에서 살고 있다. 미국 유학 전 대전에서 태어난 큰 아들은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간 아들은 군대생활도 대전에서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낳은 딸도 대전이 고향이다.
그에게 대전은 애정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는 대전을 사랑한다. 그에게 대전은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도시다.
“대전은 대덕연구단지를 비롯해 훌륭한 인적·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 도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걸맞게 발전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대전에 사는 것만으로도 대전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아직도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그는 대덕연구단지가 세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연구단지라고 역설한다. 그걸 기반으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연구원시절부터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벤처기업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같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가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를 거쳐 현재 중소기업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그의 관심이 점차 범위를 넓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전이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환경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2002년 대전시립교향악단 후원회로 활동을 시작한 ‘높은음자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
“높은음자리표는 대전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일터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놀이문화가 갖춰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단체죠. 저도 재미있는 동네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참여하게 됐고요.”
훌륭한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를 선도해나가는 도시 대전.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며, 더불어 살아가면서 대전시민의 자부심을 지켜가는 도시 대전. 그가 바라는 ‘나의 삶터 대전’의 모습이다.


중간제목 : 워킹맘, 가정을 말하다
그는 표준과학연구원에 근무하는 남편과 대학 재학 시절 만났다. 남편이 연세대 화학과 2년 선배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 장녀, 둘의 신혼은 단칸방에서 시작됐다. 양쪽 집안을 부양하는 것도 부부의 몫이었다. 직장 생활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대학생활도 장학금으로 한 부부는 미국유학도 장학금으로 버텼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힘이 들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니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밀고 온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생각해 보면 직장 생활이 단순히 경제적인 힘이 됐던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기여도 했다는 생각이다.
그의 큰 아들은 연세대에 재학 중이다. 작은 딸은 중학교 3학년이 된다. 공부도 곧잘 한다. 워킹맘으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유학시절 미국에서는 오히려 어려운 점이 별로 없었어요.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왔는데 학부모회의를 오전 10시에 하더라고요. 미국에서는 부모들이 퇴근한 후에 했거든요. 당연히 전업주부들의 네트워크에 끼지 못했죠. 그 덕분에 아이가 왕따 아닌 왕따가 됐어요. 연구원 시절에 여성연구원이 6명 있었는데 애가 둘인 것은 나 밖에 없었어요. 그만큼 일하는 엄마 노릇이 어렵다는 얘기지요.”
아들은 귀국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주위 엄마들은 ‘직장이 뭐가 중요하냐 아이가 중요하지’라며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들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율적인 생활습관을 키워주고 간섭하지 않았다.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기가 보여주기 전에는 성적표를 보지 말아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궁금하기는 했지만 보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3학년 2학기 학기말 고사에서 전교 1등한 성적표를 처음으로 보여주더군요. 그전에는 중하위권 정도의 성적이었던 걸로 짐작만 하고 있었지요.”
그는 워킹맘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장점도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도 우리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고 그 속에서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냥 엄마가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엄마에 대한 만족감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딸에게는 엄마의 이런 모습이 더 좋아 보이는 것 같아요.”
워킹맘인 그에게 물었다, 삶의 가장 큰 보람이 뭐냐고. 삶의 가장 큰 보람은 자식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중간제목 : 여자 나이 쉰, 꿈을 말하다
그는 대학과 미국유학을 모두 장학금으로 해결했다. 그게 모두 나 자신이 똑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이 사회가 베풀어준 혜택이었다. 나이 쉰은 그걸 깨닫게 해준다.
유학 시절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도 새삼 그리워진다. 애까지 딸린 가난한 유학생 부부는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아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영어를 가르쳐주고 미국생활의 적응을 도와준 자원봉사자들, 외국인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진료소를 운영하던 사람들은 쉰 살의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쳐준다.
“지금까지의 삶은 나와 내 가족이 우선이었지요. 이제는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퇴직 후의 계획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그는 퇴직 후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웃과 지역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찾아 70~80대까지 사회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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