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은 명주실 올을 꼬는 것부터 시작해 술을 달아 장식할 때까지 전 과정을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끝내는 느림의 작업이다. 일일이 손으로 엮고 단정히 조여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는 균형과 질서, 그렇기에 정갈한 마음과 정성이 없다면 아름다운 매듭작품은 탄생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매듭은 우리 인생살이와 다르지 않다. 잘 맺어야 하고 또한 잘못 맺은 것은 잘 풀어야 하는…. 그 길을 30여 년 묵묵히 걸어온 매듭장인 황순자(59)씨. 갤러리에 들어선 듯, 한길을 걸어온 장인의 단아한 매듭작품들이 아름다운 관산동 집에서 그를 만났다.
좌절된 서독행이 매듭 인생의 단초가 되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손수 염색하고 다듬이질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라선지 손으로 만드는 것이 좋았단다. 여학교에서도 그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은 수예나 자수시간. 손재주 좋던 그의 작품은 늘 가사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수예며 자수는 좋아하는 취미일 뿐,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에 있어 서독 파견 간호사가 대세였던 시기라 그도 자연스럽게 간호학교로 진학했다.
“지금처럼 여성의 사회진출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이 별로 없었고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은 더더구나 없던 시절이었죠. 서독 간호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로 그의 서독 행은 좌절되고, 서울로 올라와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
그런 그에게 매듭은 운명이었는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취미로 계속 수를 놓던 20대 후반 무렵 공모전에 입선을 하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자수대학에서 침선과 자연염색, 매듭공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매듭에 빠지게 된 것은 매듭장인 고 김주현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전통복식과 의구의 장식으로 사용되면서 아무 물건에나 함부로 달릴 수가 없는, 그 자체가 신성스러움을 지닌 매듭을 엮는 일에 깊이 빠져버렸다.
혼자서 뽐내지 못하는 매듭은 외로운 작업, 그럴수록 지성을 다했다
매듭은 다른 공예품과는 달리 단독으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혼자서 뽐내지 못하고 다른 어느 기물에 달려져서야 그 기능이 돋보이는 매듭. 그 외로운 작업에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길도 외롭고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공예사단법인체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원을 받는데다 역사박물관에서 당당히 전시할 수 있는 전통공예로 자리 잡았지만 그가 처음 매듭을 시작할 때만 해도 김주현 선생을 비롯해 몇몇의 명장들이 어렵게 후진을 양성하고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현재의 한국매듭공예연합회나 (사)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등 전통매듭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된 근간에는 그의 노력과 헌신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그의 뒤에 큰 소나무처럼 말없이 지원해준 남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매듭에 관련된 것이라면 가마도 사들이는 등 큰돈 아끼지 않는 그에게 “고마 좀 쏟아 부으라”고 한마디 하지만 “지청구를 하면서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주는 은근함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란다.
보다 더 질 높은 작품 활동 위해 매듭 관광 상품 사업에 뛰어들다
한 올 한 올 명주 끈을 엮어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매듭은 앞면과 뒷면이 똑같고 좌우는 대칭이며 중심에서 시작해 중심에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단아하면서 자연스런 색상이 돋보이는데 이는 자연 그대로의 색깔을 좋아하는 탓에 명주실을 천연염색하기 때문. 이런 그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은 청와대의 접견실 발의 테두리나 덕수궁 큰북의 매듭을 장식하기도 했다. 1994년 한·수 예술 공모전 매듭 입선을 시작으로 2009년 대한민국 관광상품대전 특선 등 그의 수상경력은 화려하다. 또 매년 회원전과 국제 매듭전, 외국의 박람회에 참가하는 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이렇게 그가 활발하게 국내외로 전시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데는 “장인의 생활은 고되고 궁핍하기 쉽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공예인들도 관광 상품 개발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에 눈을 떠야한다”는 고 김주현 선생의 평소 지론이 큰 힘이 됐다. 관광 상품 사업에 뛰어들어 ‘신혼방’이라는 상표를 달고 명함통이나 핸드폰걸이, 명함지갑 등 특허를 낸 그는 돈 안 되는(?) 작품 활동도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최근 중국 수입산으로 예전보다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식구 같은 직원들의 소중한 일터”라는 생각에 어려움도 행복이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올해는 특히 그에게 의미 있는 일이 많았다. 2월 인사아트센터에서 매듭인생 30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10월 경남 우포에서 열린 람사르총회에서 기념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10월 6일 고향 진주에서 전시를 해달라는 요청에 의해 ‘인로왕번’과 오랫동안 공들인 황제후수(왕포의 뒤와 옆 장식에 쓰임)와 왕비폐대(왕비의 옷 뒤와 옆 장식에 쓰임)를 재연한 귀한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매듭이 유물과 같은 전통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전통이 되기를 바라며, 또 그러기 위해 소장 작품들을 전시하고 나누는 문화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는 매듭연구가 황순자. 그 꿈 또한 머지않아 아름다운 매듭으로 결실을 맺지 않을까.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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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서독행이 매듭 인생의 단초가 되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손수 염색하고 다듬이질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라선지 손으로 만드는 것이 좋았단다. 여학교에서도 그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은 수예나 자수시간. 손재주 좋던 그의 작품은 늘 가사선생님의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수예며 자수는 좋아하는 취미일 뿐,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에 있어 서독 파견 간호사가 대세였던 시기라 그도 자연스럽게 간호학교로 진학했다.
“지금처럼 여성의 사회진출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이 별로 없었고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길은 더더구나 없던 시절이었죠. 서독 간호사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반대로 그의 서독 행은 좌절되고, 서울로 올라와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
그런 그에게 매듭은 운명이었는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취미로 계속 수를 놓던 20대 후반 무렵 공모전에 입선을 하게 됐고, 그것을 계기로 자수대학에서 침선과 자연염색, 매듭공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매듭에 빠지게 된 것은 매듭장인 고 김주현 선생을 만나면서부터. 전통복식과 의구의 장식으로 사용되면서 아무 물건에나 함부로 달릴 수가 없는, 그 자체가 신성스러움을 지닌 매듭을 엮는 일에 깊이 빠져버렸다.
혼자서 뽐내지 못하는 매듭은 외로운 작업, 그럴수록 지성을 다했다
매듭은 다른 공예품과는 달리 단독으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혼자서 뽐내지 못하고 다른 어느 기물에 달려져서야 그 기능이 돋보이는 매듭. 그 외로운 작업에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길도 외롭고 쉽지 않은 길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공예사단법인체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지원을 받는데다 역사박물관에서 당당히 전시할 수 있는 전통공예로 자리 잡았지만 그가 처음 매듭을 시작할 때만 해도 김주현 선생을 비롯해 몇몇의 명장들이 어렵게 후진을 양성하고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현재의 한국매듭공예연합회나 (사)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등 전통매듭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게 된 근간에는 그의 노력과 헌신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그의 뒤에 큰 소나무처럼 말없이 지원해준 남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매듭에 관련된 것이라면 가마도 사들이는 등 큰돈 아끼지 않는 그에게 “고마 좀 쏟아 부으라”고 한마디 하지만 “지청구를 하면서도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주는 은근함이 우리 시대의 사랑”이란다.
보다 더 질 높은 작품 활동 위해 매듭 관광 상품 사업에 뛰어들다
한 올 한 올 명주 끈을 엮어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매듭은 앞면과 뒷면이 똑같고 좌우는 대칭이며 중심에서 시작해 중심에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단아하면서 자연스런 색상이 돋보이는데 이는 자연 그대로의 색깔을 좋아하는 탓에 명주실을 천연염색하기 때문. 이런 그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은 청와대의 접견실 발의 테두리나 덕수궁 큰북의 매듭을 장식하기도 했다. 1994년 한·수 예술 공모전 매듭 입선을 시작으로 2009년 대한민국 관광상품대전 특선 등 그의 수상경력은 화려하다. 또 매년 회원전과 국제 매듭전, 외국의 박람회에 참가하는 일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
이렇게 그가 활발하게 국내외로 전시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데는 “장인의 생활은 고되고 궁핍하기 쉽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공예인들도 관광 상품 개발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일에 눈을 떠야한다”는 고 김주현 선생의 평소 지론이 큰 힘이 됐다. 관광 상품 사업에 뛰어들어 ‘신혼방’이라는 상표를 달고 명함통이나 핸드폰걸이, 명함지갑 등 특허를 낸 그는 돈 안 되는(?) 작품 활동도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최근 중국 수입산으로 예전보다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식구 같은 직원들의 소중한 일터”라는 생각에 어려움도 행복이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올해는 특히 그에게 의미 있는 일이 많았다. 2월 인사아트센터에서 매듭인생 30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10월 경남 우포에서 열린 람사르총회에서 기념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10월 6일 고향 진주에서 전시를 해달라는 요청에 의해 ‘인로왕번’과 오랫동안 공들인 황제후수(왕포의 뒤와 옆 장식에 쓰임)와 왕비폐대(왕비의 옷 뒤와 옆 장식에 쓰임)를 재연한 귀한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매듭이 유물과 같은 전통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전통이 되기를 바라며, 또 그러기 위해 소장 작품들을 전시하고 나누는 문화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는 매듭연구가 황순자. 그 꿈 또한 머지않아 아름다운 매듭으로 결실을 맺지 않을까.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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