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해 달려라, 저 기차처럼”
여성무원에서 기관사까지, 화려한 철도경력
대륙철도 진출 꿈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
“우리 기차가 대륙을 달려 멀리 유럽까지 가는 날을 상상하면 절로 힘이 납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코레일연구원 박은경 연구원은 긴 러시아 철로만큼이 대륙진출의 꿈 얘기를 풀어놨다.
철도 여승무원에서 기관사로, 차량검수원으로, 다시 대륙철도 진출의 꿈을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로. 그녀는 15년 철도 인생에서 누구도 따라 하기 힘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또한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는 러시아철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누가 들어도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이력 뒤에는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주저 않고 달려들었던 그녀만의 ‘열정’이 숨어있다.
◆ 여승무원이 철도와의 첫 인연 = 그녀가 철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 새마을호 여승무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그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러다 철도 ‘여행이 직업’인 여승무원에 매료돼 94년 당시 철도청에 입사했다. 그렇게 3년. 그녀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이라는 색다른 직업에 만족하며 전국을 누볐다. 하지만 ‘새로운 꿈을 위한 그녀의 도전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여승무원은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꾸지람도 자극이 됐다.
“아버지께서 ‘기차를 끌어도 시원찮은데 객차에서 서비스나 하고 있냐’고 마뜩찮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결국 그녀는 기관사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 국내 첫 여성 기관사의 꿈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관사가 되고 싶었어요. 철도청에 입사하고 나서 생신 새로운 꿈이었죠.”
결국 그는 97년 철도대학 운전과 입학을 결심하게 되고, 결심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그의 새로운 꿈은 ‘국내 최초의 여성 기관사’. 박은경씨는 그 해 함께 철도청에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2학년 때는 임신해 배가 부른 상태에서 학교를 다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첫 여성 기관사’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최초’를 향한 그녀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철도대 한 해 선배인 강은옥씨가 첫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다.
박은경씨는 이후 짧은 기관사 생활을 접고 2000년 차량검수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여성이 일하기에는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해 한 곳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부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대학을 여러 차례 옮겨 다닌 것 말고도 여승무원, 기관사 등 근무시간이 불규칙하고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분야에서 일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야 할 책임감이 그녀를 잠시 한 곳에 머물게 했다.
◆ 대륙 진출의 꿈을 가슴에 품다 = 하지만 안정된 생활도 잠시.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륙철도 진출의 꿈’이었다.
시흥차량사무소 시절 만난 시베리아교통대학 방문단이 계기가 됐다. 철도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남긴 “대륙을 꿈꾸라”는 말도 자극을 줬다. 그녀는 마침내 ‘러시아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큰 아이가 네 살이었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고, 현실적인 고민도 컸다. 주변에서는 ‘독하다’는 비난 아닌 비난도 들어야했다. 하지만 대륙진출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철도 관련 러시아 최고 명문이라는 ‘러시아 철도대학’으로 떠났다. ‘철도물류’ 분야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 당시로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았던 터라 새로운 분야에 대한 개척이라는 나름의 사명도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5년을 보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네 살배기 어린 딸과 함께 떠난 유학길이 편했을 리 없다. 미리 배운 러시아어도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러시아 유학생활은 의도했건, 아니면 운이 좋았건 러시아 철도의 상당한 인맥을 얻었다. 딸을 돌봐주던 보모까지도 전 모스크바 철도대학 총장을 지낸 분의 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인간관계가 한국과 러시아 간 철도 교류에서 감초 역할을 하곤 한다.
◆ 철도 아는 러시아어 통역인 ‘박은경’ = 지난달 180여명의 철도인들이 12박13일을 함께한 시베리아횡단철도 탐방에서 그녀의 진가가 발휘됐다.
우선 참가 인원이 많아 전세열차가 필요했지만 계약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일정이 촉박한 탓에 출국 하루 전에야 겨우 전세열차 계약이 이뤄졌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 허준영 사장과 러시아철도공사 야쿠닌 사장의 친분이 큰 도움이 됐다. 우선 양쪽 사장 사이에 ‘원만한 협조’ 약속이 있었던 터라 박은경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큰 소리(?)’를 쳐가며 계약을 이끌었다. 마침 러시아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모스크바철도대학 동문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일정 내내 다른 통역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전문 통역인들이 철도 용어를 몰라 내용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진가가 돋보였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 이면에 철도지식과 러시아 철도조직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나라는 물론 러시아 철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 남편 절대적 신뢰로 가능했던 꿈 = 그녀의 숱한 도전 앞에는 늘 현실의 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나 그녀는 크게 주저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홀로 둔 채 어린 아이만 대리고 떠난 러시아 유학을 결정할 때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간도 길었고 생활비나 학비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심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줬다. 같은 철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해’였겠지만, 그래도 남편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녀의 꿈에 동참했다. 남편은 현재 KTX 여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가 러시아로 떠난 5년 동안 남편이 남들 숙직까지 대신 서 가며 억척스럽게 일했다더군요. 남편의 절대적인 신뢰 덕분에 지금도 제가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를 닮아서일까. 그녀의 큰 딸도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벌써 외국 유학길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인이 유학을 원했고, 이번에는 영어권인 아일랜드를 택했다. 2년 후 졸업하면 중학교는 다시 미국이나 캐나다로 보낼 생각이다.
“엄마때문에 딸아이가 고생하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다행히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해 줘 고맙죠. 제가 꿈을 위해 대학만 대여섯 곳을 옮겨 다녔듯 제 딸 역시 아직 어리지만 자기 나름의 꿈을 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녀의 바람처럼 그녀의 딸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해 이미 자신만의 ‘꿈을 향한 도전’에 나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르쿠츠크=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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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무원에서 기관사까지, 화려한 철도경력
대륙철도 진출 꿈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
“우리 기차가 대륙을 달려 멀리 유럽까지 가는 날을 상상하면 절로 힘이 납니다.”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만난 코레일연구원 박은경 연구원은 긴 러시아 철로만큼이 대륙진출의 꿈 얘기를 풀어놨다.
철도 여승무원에서 기관사로, 차량검수원으로, 다시 대륙철도 진출의 꿈을 품은 러시아철도 전문가로. 그녀는 15년 철도 인생에서 누구도 따라 하기 힘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또한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는 러시아철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누가 들어도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이력 뒤에는 언제나 꿈을 이루기 위해 주저 않고 달려들었던 그녀만의 ‘열정’이 숨어있다.
◆ 여승무원이 철도와의 첫 인연 = 그녀가 철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4년. 새마을호 여승무원으로 입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그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그러다 철도 ‘여행이 직업’인 여승무원에 매료돼 94년 당시 철도청에 입사했다. 그렇게 3년. 그녀는 ‘새마을호 여승무원’이라는 색다른 직업에 만족하며 전국을 누볐다. 하지만 ‘새로운 꿈을 위한 그녀의 도전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여승무원은 필요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꾸지람도 자극이 됐다.
“아버지께서 ‘기차를 끌어도 시원찮은데 객차에서 서비스나 하고 있냐’고 마뜩찮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결국 그녀는 기관사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 국내 첫 여성 기관사의 꿈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기관사가 되고 싶었어요. 철도청에 입사하고 나서 생신 새로운 꿈이었죠.”
결국 그는 97년 철도대학 운전과 입학을 결심하게 되고, 결심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그의 새로운 꿈은 ‘국내 최초의 여성 기관사’. 박은경씨는 그 해 함께 철도청에 근무하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2학년 때는 임신해 배가 부른 상태에서 학교를 다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첫 여성 기관사’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아쉽게도 ‘최초’를 향한 그녀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철도대 한 해 선배인 강은옥씨가 첫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다.
박은경씨는 이후 짧은 기관사 생활을 접고 2000년 차량검수분야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여성이 일하기에는 쉽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당시에는 남편과 아이를 생각해 한 곳에 머물면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부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대학을 여러 차례 옮겨 다닌 것 말고도 여승무원, 기관사 등 근무시간이 불규칙하고 먼 거리를 다녀야 하는 분야에서 일했다.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 살아야 할 책임감이 그녀를 잠시 한 곳에 머물게 했다.
◆ 대륙 진출의 꿈을 가슴에 품다 = 하지만 안정된 생활도 잠시.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륙철도 진출의 꿈’이었다.
시흥차량사무소 시절 만난 시베리아교통대학 방문단이 계기가 됐다. 철도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남긴 “대륙을 꿈꾸라”는 말도 자극을 줬다. 그녀는 마침내 ‘러시아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당시 큰 아이가 네 살이었다. 주변의 만류도 많았고, 현실적인 고민도 컸다. 주변에서는 ‘독하다’는 비난 아닌 비난도 들어야했다. 하지만 대륙진출에 대한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철도 관련 러시아 최고 명문이라는 ‘러시아 철도대학’으로 떠났다. ‘철도물류’ 분야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 당시로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 않았던 터라 새로운 분야에 대한 개척이라는 나름의 사명도 있었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5년을 보냈다. 남편은 한국에 남겨둔 채 네 살배기 어린 딸과 함께 떠난 유학길이 편했을 리 없다. 미리 배운 러시아어도 그리 유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러시아 유학생활은 의도했건, 아니면 운이 좋았건 러시아 철도의 상당한 인맥을 얻었다. 딸을 돌봐주던 보모까지도 전 모스크바 철도대학 총장을 지낸 분의 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인간관계가 한국과 러시아 간 철도 교류에서 감초 역할을 하곤 한다.
◆ 철도 아는 러시아어 통역인 ‘박은경’ = 지난달 180여명의 철도인들이 12박13일을 함께한 시베리아횡단철도 탐방에서 그녀의 진가가 발휘됐다.
우선 참가 인원이 많아 전세열차가 필요했지만 계약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일정이 촉박한 탓에 출국 하루 전에야 겨우 전세열차 계약이 이뤄졌을 정도다. 이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 허준영 사장과 러시아철도공사 야쿠닌 사장의 친분이 큰 도움이 됐다. 우선 양쪽 사장 사이에 ‘원만한 협조’ 약속이 있었던 터라 박은경씨는 러시아를 상대로 ‘큰 소리(?)’를 쳐가며 계약을 이끌었다. 마침 러시아 책임자 중 한 사람이 모스크바철도대학 동문이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또한 러시아 일정 내내 다른 통역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전문 통역인들이 철도 용어를 몰라 내용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그녀의 진가가 돋보였다.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 이면에 철도지식과 러시아 철도조직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사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우리나라는 물론 러시아 철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 남편 절대적 신뢰로 가능했던 꿈 = 그녀의 숱한 도전 앞에는 늘 현실의 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마나 그녀는 크게 주저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홀로 둔 채 어린 아이만 대리고 떠난 러시아 유학을 결정할 때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기간도 길었고 생활비나 학비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심하고 있을 때 남편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줬다. 같은 철도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해’였겠지만, 그래도 남편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녀의 꿈에 동참했다. 남편은 현재 KTX 여객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가 러시아로 떠난 5년 동안 남편이 남들 숙직까지 대신 서 가며 억척스럽게 일했다더군요. 남편의 절대적인 신뢰 덕분에 지금도 제가 세상 앞에 당당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를 닮아서일까. 그녀의 큰 딸도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벌써 외국 유학길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본인이 유학을 원했고, 이번에는 영어권인 아일랜드를 택했다. 2년 후 졸업하면 중학교는 다시 미국이나 캐나다로 보낼 생각이다.
“엄마때문에 딸아이가 고생하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다행히 외국 생활에 잘 적응해 줘 고맙죠. 제가 꿈을 위해 대학만 대여섯 곳을 옮겨 다녔듯 제 딸 역시 아직 어리지만 자기 나름의 꿈을 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녀의 바람처럼 그녀의 딸 역시 자신의 꿈을 위해 이미 자신만의 ‘꿈을 향한 도전’에 나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르쿠츠크=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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