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대교를 달리다 김포시로 접어들자 김포의 넓은 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방금 지나쳤던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들과 불과 몇 백 미터 사이, 온통 푸르름 사이로 비닐하우스들이 스머프의 집처럼 자리 잡고 있는 그곳에 ‘내유농원’이 있다. 그 곳의 주인장은 조은미(52)씨. 그의 미소 때문일까? 뜨거운 태양 볕으로 이글거리는 바깥보다 오히려 비닐하우스 안이 서늘하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는 그. 도회적인 이미지와 달리 농장과 함께 한 세월이 벌써 18년째라는 조은미 대표를 만났다.
귀농, 남편은 ‘설득’하고 아내는 ‘마다’하고
내유농원은 양치식물 전문 농원이다. 익숙한 동작으로 쏙쏙 자라고 있는 어린 더피 사이로 물을 주고 있는 조은미씨는 농원보다는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들고 필드를 누비면 훨씬 더 어울릴 듯싶다.
“대부분 내 첫 인상만 보고 직접 농원 하는 것 맞느냐고 묻는다”고 웃는 그는 400여 평의 농원을 아주 바쁠 때 잠시 일손을 빌리는 것을 제외하고 혼자 힘으로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일을 하다 뒤돌아보면 어느 사이 쏙쏙 자란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이 대단하다”지만, 처음부터 농원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초 그의 남편은 전형적인 전문직 화이트칼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인이었고, 그는 전업주부로 살림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늘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우연치 않게 방향전환을 해, 18년 전 남편과 함께 내유동에서 농원을 시작했다. 지금의 ‘내유농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시기. 도시에서만 살아온 남편은 오히려 멋모르고 설득하고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농사일의 고충을 알기에 마다하는 시작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노력한 만큼 보답하는 농원 일에 재미가 있었단다.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
애쓰고 힘든 만큼 배반하지 않는 농원 일이 차츰 자리잡아가면서 안정될 즈음, 아이들이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일 무렵 그는 싱글 맘이 되었다. “갑작스런 아픔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는 어쩌면 농원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편이 계속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전업주부로 남았을테고, 전업주부로 있었다면 자포자기 상태에서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 지나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있고 돌보아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단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고 말은 하지만 담담해지고 당당해지기까지 아픔이 없을 리 있을까.
다행히 혼자서도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농원 시설이나 시스템이 자리 잡을 무렵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맞은 아이들 걱정이 제일 컸다고. “다른 건 몰라도 인덕은 있는 것 같다”는 조은미씨는 많은 이들이 그의 아픔을 같이 하고 마음을 함께 해주었지만 가장 큰 백그라운드로 친정아버지를 꼽는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8남매나 되는 자녀들을 위해 일일이 기도를 드릴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 분이라고 회상한다. “밥상을 앞에 놓고 8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나하나 기도드렸으니 늘 식어 맛없는 밥을 먹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하지만 나중엔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기도와 “대신 넌 자식이 잘 될거야”라는 덕담을 해주시던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의 두 아들은 당당한 직장인으로, 또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 버팀목으로 잘 자라주었다고 믿는단다.
그동안 내유동에서 삼송리를 거쳐 내유농원은 이전에 마련해두었던 김포 땅에 자리를 잡았다. 농원을 시작한 지 18년, 혼자 농원을 운영한 지는 12년 째. 아침에 출근해서 하우스 문을 열고 자식 같은 더피에 물을 주다가 문득 되돌아보면, 흙에 묻혀 보이지 않던 작은 것들이 어느 사이 쏙쏙 자라 제법 모양새가 나는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에 아픈 시간들도 묻혀 지나갔다는 그.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가 참 멋지다.
농원은 오히려 세심한 여성에게 적합
“농원일이 예전처럼 일일이 노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화된 시설로 여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조언하는 조은미씨는 물을 주고 농약을 치는 등 초기 시설을 잘 갖춰놓으면 적정한 크기의 농원 정도는 여자 혼자 해나가도 어떤 사업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어떤 작물을 기를 것인가에 대한 공부나 연구를 위해 농업전문학교 등에서 자기계발도 필요하고 같은 분야의 사람들과 트렌드에 대한 소통도 나눠야 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지만.
“어떤 사업이든 그 정도 노력하지 않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농원일이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오히려 여성에게 맞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쉬운 것은 없다”는 그는 “할 것 없으니까 농사나 짓지”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화초도 유행이 있어 어떤 것이 잘 된다 싶으면 자칫 수급과잉으로 말 그대로 엎어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미련 없이 엎어버리고 빨리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여린 첫 인상을 확 깨는 카리스마,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여유로움…. 그는 참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我줌마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귀농, 남편은 ‘설득’하고 아내는 ‘마다’하고
내유농원은 양치식물 전문 농원이다. 익숙한 동작으로 쏙쏙 자라고 있는 어린 더피 사이로 물을 주고 있는 조은미씨는 농원보다는 골프장에서 골프채를 들고 필드를 누비면 훨씬 더 어울릴 듯싶다.
“대부분 내 첫 인상만 보고 직접 농원 하는 것 맞느냐고 묻는다”고 웃는 그는 400여 평의 농원을 아주 바쁠 때 잠시 일손을 빌리는 것을 제외하고 혼자 힘으로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일을 하다 뒤돌아보면 어느 사이 쏙쏙 자란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이 대단하다”지만, 처음부터 농원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 초 그의 남편은 전형적인 전문직 화이트칼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인이었고, 그는 전업주부로 살림재미에 푹 빠져 살았다. 늘 같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삶은 우연치 않게 방향전환을 해, 18년 전 남편과 함께 내유동에서 농원을 시작했다. 지금의 ‘내유농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시기. 도시에서만 살아온 남편은 오히려 멋모르고 설득하고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농사일의 고충을 알기에 마다하는 시작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노력한 만큼 보답하는 농원 일에 재미가 있었단다.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
애쓰고 힘든 만큼 배반하지 않는 농원 일이 차츰 자리잡아가면서 안정될 즈음, 아이들이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일 무렵 그는 싱글 맘이 되었다. “갑작스런 아픔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는 어쩌면 농원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남편이 계속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전업주부로 남았을테고, 전업주부로 있었다면 자포자기 상태에서 우울증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 지나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있고 돌보아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단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고 말은 하지만 담담해지고 당당해지기까지 아픔이 없을 리 있을까.
다행히 혼자서도 운영해나갈 수 있도록 농원 시설이나 시스템이 자리 잡을 무렵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맞은 아이들 걱정이 제일 컸다고. “다른 건 몰라도 인덕은 있는 것 같다”는 조은미씨는 많은 이들이 그의 아픔을 같이 하고 마음을 함께 해주었지만 가장 큰 백그라운드로 친정아버지를 꼽는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8남매나 되는 자녀들을 위해 일일이 기도를 드릴 정도로 사랑을 베푸신 분이라고 회상한다. “밥상을 앞에 놓고 8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나하나 기도드렸으니 늘 식어 맛없는 밥을 먹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하지만 나중엔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기도와 “대신 넌 자식이 잘 될거야”라는 덕담을 해주시던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의 두 아들은 당당한 직장인으로, 또 엄마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 버팀목으로 잘 자라주었다고 믿는단다.
그동안 내유동에서 삼송리를 거쳐 내유농원은 이전에 마련해두었던 김포 땅에 자리를 잡았다. 농원을 시작한 지 18년, 혼자 농원을 운영한 지는 12년 째. 아침에 출근해서 하우스 문을 열고 자식 같은 더피에 물을 주다가 문득 되돌아보면, 흙에 묻혀 보이지 않던 작은 것들이 어느 사이 쏙쏙 자라 제법 모양새가 나는 푸른 것들이 주는 행복, 그 성취감에 아픈 시간들도 묻혀 지나갔다는 그. “버티는 행복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가 참 멋지다.
농원은 오히려 세심한 여성에게 적합
“농원일이 예전처럼 일일이 노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기계화된 시설로 여성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조언하는 조은미씨는 물을 주고 농약을 치는 등 초기 시설을 잘 갖춰놓으면 적정한 크기의 농원 정도는 여자 혼자 해나가도 어떤 사업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어떤 작물을 기를 것인가에 대한 공부나 연구를 위해 농업전문학교 등에서 자기계발도 필요하고 같은 분야의 사람들과 트렌드에 대한 소통도 나눠야 하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지만.
“어떤 사업이든 그 정도 노력하지 않는 것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농원일이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오히려 여성에게 맞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쉬운 것은 없다”는 그는 “할 것 없으니까 농사나 짓지”라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고 조언한다.
“화초도 유행이 있어 어떤 것이 잘 된다 싶으면 자칫 수급과잉으로 말 그대로 엎어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미련 없이 엎어버리고 빨리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여린 첫 인상을 확 깨는 카리스마,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면의 여유로움…. 그는 참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我줌마다.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