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간 경우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이 진짜 범인이라고 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특히 용의자가 범죄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증거가 필요하다.
수사기관은 통상 ‘목격자가 진술한 범인의 인상 착의’에 기초하여 용의자를 찾아내고 이를 목격자에게 확인받는다. 목격자는 초동 수사 단계에서 수사관에게 자신이 목격한 범인의 인상 착의를 진술한다.
그러면 수사관은 그 인상 착의에 부합하는 가장 그럴 듯한 용의자(suspect)의 사진을 찾아내거나 몽타쥬 등을 만들어서 목격자로 하여금 보게 하고 목격자가 기억하고 있는 범인과 그 용의자가 일치하는지 여부를 묻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수사기관이 용의자를 한사람만 제시하여 목격자로 하여금 동일성 여부를 판정하도록 하면 목격자에게 ‘수사기관은 이 용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구나’하는 암시를 주어 엉뚱한 사람을 지목할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
197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인지심리학자들은 모의 실험을 하였는데 목격자들의 범인 지목 실패 확률이 40-50%에 달하였다.
최근에는 DNA 검사 방법의 발전으로 오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실증적 분석결과 오판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목격자의 범인 지목 잘못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미국과 영국에서는 범인 식별의 잘못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를 발전시켜 왔다. 그 중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테크놀로지의 하나가 ‘줄세우기(lineup)’ 기술이다.
몇 년 전 부산에서 9세 된 여자 아이를 강간한 용의자에 대하여 무죄 판결이 내려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 강간범이 체포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9세 여자 아이의 진술이었다. 사건 발생 후 20일 정도가 지난 후 피해자가 수사기관이 제시한 47명의 사진 속에서 1명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이어진 범인식별 절차에서 수사기관이 피해자가 지명한 1명만을 촬영한 동영상을 피해자에게 보여주고, 그 용의자 1명만을 직접 보여준 다음 피해자로부터 범인이 맞다는 진술을 다시 받아냈다. 그리고 나서 용의자를 포함한 3명을 동시에 피해자에게 대면시켜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확인을 받았던 사건이었다.
법원은 용의자 줄 세우기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줄세우기에 의한 범인 지목을 믿을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분명히 피해자가 범인으로 지목하였음에도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판결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재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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