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일꿈

지역내일 2009-05-29
김 차장에게 지하철이 주는 의미
김현필 ING생명보험 차장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바쁜 일정이 시작되어 거의 매일 야근의 연속이다.
이메일 체크, 미팅, 업무보고, 보고서 검토 및 수정,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와 이메일로 하루 하루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하루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지만 동시에 이렇게 개인적인 집중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많은 공간이 바로 사무실이기도 하다. 집중해서 무언가를 검토하거나 구상을 할 때에 10분 연속을 넘기기가 힘들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난 지금, 생후 100일정도 되는 아기가 생겼다. 그저 신기하고 예쁜 아이지만 맞벌이를 해야 하는 우리 부부에게는 육아문제가 큰 걱정 거리다. 가정부를 구하긴 하였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장모님께서 챙겨주시면 좋겠다는 기대심리에, 장인·장모님이 친구분들보다 한참 늦게 보게 돼 더욱 예쁜 손녀를 좀더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우리 부부는 합의를 했고 처가댁 근처로 이사했다. 회사하고는 좀 더 먼 곳이다.
이사 가기 전에는 통근시간이 약 40분 정도였지만 지금은 1시간이 조금 넘는다. 통근시간이 멀어지는 것도 싫었고, 아기를 달갑지 여기지 않았던 나였는데 내 아이가 생기니 이렇게 달라졌다. 그런 결정을 내린 내가 스스로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대견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사간 후 며칠 동안, 지하철에서의 길어진 통근시간이 꽤 지루하게 느껴졌고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지루한 지하철에서의 시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출퇴근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게 됐다. 지하철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 바로 그것이었다. 회사에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자료나 문서 검토, 또는 독서를 지하철에서 하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전화도 오지 않고 체크할 이메일도 없는 지하철이 완벽한 근무 공간이 됐다. 약 40분 정도 되는 지하철 탑승시간의 업무효율은 사무실에서의 2시간보다 더 높은 경우가 많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팀원들에게 자료 검토나 아이디어 구상을 지시할 때, 지하철에서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이 자료 읽어보고 의견 좀 줘봐” 이렇게 팀원들에게 이야기하면 조 주임은 “지하철에서 읽어보란 말씀이죠?” 라고 답하고 박 대리는 “저는 세 정거장만 가면 내리는데요, 팀장님”이라 라고 답한다. “그럼 2호선 한 바퀴 더 돌아!” 농담 섞인 대화지만 이런 식이다. 야근이 잦고 좀 더 편해지고 싶은 욕심에 차를 몰고 출퇴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지하철이라는 마술 같은 공간이 주는 매력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회사에서 바쁘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회사에게, 동료들에게 그만큼 필요하다는 존재라는 의미니까 말이다. 나에게 지하철은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을 준다. 가치있는 시간(Quality time)을 주는 장소니까 말이다. 이 글을 마치고 나는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탈 것이다. 지하철이 다가오면 벨소리와 바람결이 나를 격려하는 것 같다. 지하철 안에는 무엇의 간섭도 없이 혼자 DMB로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 독서하는 사람들, 음악을 듣는 사람들,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모두 지하철 안에서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진정 지하철은 서울 시민에게, 나 같은 월급쟁이에게 축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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