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 이정순 화가
“저물어가며 빛나고 싶다”
60에 ‘다시 태어난’ 농촌마을 부녀회장
지역 어린이 위한 미술·목공교실이 꿈
“힘든 삶일 수 있는데 긍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살아가는 모습을 자연과 어우러지게 담았어요. 쉽게 지나치는 풍경을 놓치지 않았어요. 부엉이 그림을 보면서는 감동했어요. 얼굴에서 연륜이 느껴지고 서로 마주보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송경숙·38)
“인사동에 가면 가끔 그림을 보는데 어려워요. 이 그림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뭘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아요. 따뜻해요.”(박주리·41)
19일 저녁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성플라자를 찾은 인근 주민들이 전시실 ‘스페이스봄’에서 감탄을 연발한다. 20일 시작되는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즉석에서 작가를 붙들고 사진촬영도 요청한다.
할머니 작가 ‘날개’ 달다
“변신 시리즈에 관심이 많아요. 새가 나무가 되고 사람이 꽃이 되고…. 사람과 자연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예요.”
이정순(60) 작가는 “그 교감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올 봄에는 마당에 핀 목련을 보면서는 작가 자신과 남편을 연상했다. 밤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목련은 밤에 활동하는 부엉이로, 오랜 세월을 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로 다.
마당에 핀 동백을 보면서는 할머니, 작가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꽃이 피어난다. 작가의 소망을 담은 그림이. 동백은 그의 예술작품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는 그 날개에서 배추를 떠올렸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채소이기도 하다. “동네를 먹여 살린다.” 그래서 배춧잎 안에 동네를 담았다.
이전에도 물론 자연을 그렸다. 이정순 작가는 “스케치 해다 그리는 자연, 풍경화로서의 자연”이라고 말했다. “들판에서 예쁜 꽃을 보면 뽑아다 화분에 심어놓고 그리곤 했어요. ‘바라보는 자연’이었던 거죠.”
지금은 그 스스로가 자연과 동화된다. 바닷가를 산책할 때는 바다 소리를 느낀다. 바다 너머에 있는 사람과 동물 신화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1년여 전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국민화가’ 모지스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 변화가 시작됐다.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01세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1600여점을 그렸어요. 그림도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에요. 자수를 좋아했는데 나이 들어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수를 놓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을 시작한 거래요.”
미국 농촌을 화폭에 담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그린 듯한 따뜻한 작품은 어찌보면 꼭 이정순 작가의 그림인 듯싶다. 이 작가는 “80세에 첫 개인전을 연 모지스 할머니 얘기를 접한 뒤 남은 인생을 그림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앞으로는 해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겠다고. 목표는 일단 10년이다. 그 이후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하늘에 매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도 지난해부터 그린 스물여덟 점을 들고 왔다.
“이전까지 그림은 취미생활이었어요. 나를 송두리째 담지 않았어요.”
작가의 자신감에 ‘날개’를 달아준 건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재단은 이 작가를 올해의 ‘여성작가날개달기프로젝트’ 대상자로 선정, 전시 공간을 내주고 전시 준비부터 홍보까지 대행한다. 날개달기 작가 8명 중 ‘스페이스봄’에서 전시회를 갖는 첫 타자다.
이장으로 부녀회장으로
그의 인생길은 순탄치 않았다.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첫 결혼에 실패했다. 도시내기가 전라도 땅끝 인근까지 들어와 살며 눈에 보이지 않게 배타적인 이웃에 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돌이켜보니 그 삶이 상상력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우연찮게 조폐공사에 취업했는데 몇 년간은 돈쓰는 재미에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날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했죠. 그림이었어요.”
당장 아마추어 작가의 길을 택했다. 스물다섯에 아마추어 작가로 개인전을 여는 ‘무모한’ 도전도 했다. 27살에는 추계예술학교에 입학, 정식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직장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는 17년 전 목포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원동연 교수를 만나 새롭게 삶을 꾸리면서 선택한 곳이다. 농가주택을 구입해 생활하고 “채마밭을 일구며” 동화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친구들도 미덥지 않아 했어요. ‘3개월만에 돌아올 거야’라고 장담을 했다. 10년간은 정말 애를 먹었다. 문화적 차이가 가장 컸다. 주변에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 옥수수며 고추며 채마밭 일구기에도 금세 시들해졌다.
“1000원이면 둘이서 먹을 만치 상추를 살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지어야 하나 싶었죠. 나이 들어 시골구석까지 들어와서 살아야 하는가 원망이 생기기도 했구요. 그림도 ‘돌파구’에 불과했어요.”
‘동네 사람’이 되기 위해 ‘이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0년 넘게 이장을 해온 동네 어른이 건강이 허락지 않은 상황이었다. 몇 년에 걸쳐 이장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웃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여명 남짓 사는 조그만 동네가 두 패로 갈리는 듯했다. 외지인 심지어 ‘여자’가 이장을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하나. 다른 쪽은 군에서 여성 이장을 장려하는데다 마땅한 인재도 없으니 원하는 사람을 시키자는 여론이었다.
“동네분들이 참 완강했어요. 무작정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거 있죠. 2년 전에 거의 명예직으로 이장을 하시던 동네 어른이 병으로 쓰러지고 더이상 할 사람이 없게 되자 시켜줬어요. 이장이 되고 나서는 우물 개량해 집집마다 상수관을 연결하고 마을 길을 넓히고 도로를 놓고 일을 많이 했어요. 그제서야 받아들이던데요.”
마을의 첫 여성 이장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1년 뒤 마을에 40대 초반 새내기 주민이 생겼다. 이주여성과 결혼해 귀농한 그에게 이장직을 넘겨주고 그는 부녀회장으로 ‘물러났다’.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며
작가는 모지스 할머니처럼 “나이들어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노래한다. 그같은 “작은 행복과 바람을 안고 화폭 앞에 선다”.
행복의 원천은 의외다. “가는 것”이다. 이정순 작가는 “내 인생의 석양도 저물어가는 해처럼 아름다움이 있었으면 하는 기대로 산다”며 “저물면서 빛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동지가 11년을 앞서 사는 남편이다. 남편은 그가 그림 그리는 걸 가장 좋아해주는 사람이다. ‘옆에 섰지만 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함께 늙어가며 위로하고 산다. 전시장에서 만난 관람객들에게도 인생 선배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머리 하얀 부부들이 함께 바라보는 게 없으면 애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요.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삶을 아름답게 꽃피우고 가자고 얘기해요.”
노부부는 작지만 큰 꿈을 품고 산다. 그 중 하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화원예술제’를 여는 것. 3년 전부터 남편 제자들과 힘을 합쳐 동네 폐교에서 개인창작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해 주민들과 함께 첫 예술제를 열었다. 교실 두칸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지역 작가들 그림을 전시하고 노래와 춤이 있는 동네 주민잔치도 열었다. 다른 지역 작가들을 초청해 스케치여행도 떠났다.
“올해는 동네 아이들 그림과 유명 작가 작품을 함께 걸고 난타공연도 엮어 한바탕 잔치를 열고 싶어요. 돈은 어떻게든 길이 생길 거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어요.”
폐교를 창작실로 계속 유지하는 일은 좀 더 어렵고 큰 바람이다. 예술가들이 주머니를 털어 연간 600만원 가량 되는 운영비를 대왔는데 무명인 지역 작가들로서는 한계에 부닥쳤다. 외부 지원이 없으면 폐교는 정말 폐교가 될 참이다.
“폐교를 살려 지역 작가나 농촌의 자연을 담고 싶은 도시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요. 지역 작가들 그림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도 만들고. 작가들이 힘을 합쳐 미술 소외계층인 동네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교와 목공학교를 열 계획도 있어요.”
이정순 작가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해준다는 걸 알았다”며 “전시회를 마치면 전남도청과 해남군청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로서는 예술가 지원에 어린이 예술교육, 나아가 관광자원까지 마련하는 셈이다.
“사실 남편이 오래도록 꿈꿔온 일인데 힘들 것 같아서 반대해왔어요. 그러나 이렇게 ‘날개를 다니’ 용기가 생겼어요. 그림을 좋아하고 화폭에 담고 발표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죠.”
백발이 성성한 화가는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렌다”며 소녀처럼 웃는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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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며 빛나고 싶다”
60에 ‘다시 태어난’ 농촌마을 부녀회장
지역 어린이 위한 미술·목공교실이 꿈
“힘든 삶일 수 있는데 긍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살아가는 모습을 자연과 어우러지게 담았어요. 쉽게 지나치는 풍경을 놓치지 않았어요. 부엉이 그림을 보면서는 감동했어요. 얼굴에서 연륜이 느껴지고 서로 마주보고 있지는 않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송경숙·38)
“인사동에 가면 가끔 그림을 보는데 어려워요. 이 그림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뭘 얘기하는지 알 것 같아요. 따뜻해요.”(박주리·41)
19일 저녁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아이들을 데리고 여성플라자를 찾은 인근 주민들이 전시실 ‘스페이스봄’에서 감탄을 연발한다. 20일 시작되는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전시회를 앞두고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즉석에서 작가를 붙들고 사진촬영도 요청한다.
할머니 작가 ‘날개’ 달다
“변신 시리즈에 관심이 많아요. 새가 나무가 되고 사람이 꽃이 되고…. 사람과 자연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예요.”
이정순(60) 작가는 “그 교감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올 봄에는 마당에 핀 목련을 보면서는 작가 자신과 남편을 연상했다. 밤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목련은 밤에 활동하는 부엉이로, 오랜 세월을 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된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로 다.
마당에 핀 동백을 보면서는 할머니, 작가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꽃이 피어난다. 작가의 소망을 담은 그림이. 동백은 그의 예술작품이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는 그 날개에서 배추를 떠올렸다.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채소이기도 하다. “동네를 먹여 살린다.” 그래서 배춧잎 안에 동네를 담았다.
이전에도 물론 자연을 그렸다. 이정순 작가는 “스케치 해다 그리는 자연, 풍경화로서의 자연”이라고 말했다. “들판에서 예쁜 꽃을 보면 뽑아다 화분에 심어놓고 그리곤 했어요. ‘바라보는 자연’이었던 거죠.”
지금은 그 스스로가 자연과 동화된다. 바닷가를 산책할 때는 바다 소리를 느낀다. 바다 너머에 있는 사람과 동물 신화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1년여 전 우연한 기회에 미국의 ‘국민화가’ 모지스 할머니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 변화가 시작됐다.
“모지스 할머니는 76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01세에 사망할 때까지 무려 1600여점을 그렸어요. 그림도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에요. 자수를 좋아했는데 나이 들어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수를 놓을 수 없게 되자 그림을 시작한 거래요.”
미국 농촌을 화폭에 담은,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그린 듯한 따뜻한 작품은 어찌보면 꼭 이정순 작가의 그림인 듯싶다. 이 작가는 “80세에 첫 개인전을 연 모지스 할머니 얘기를 접한 뒤 남은 인생을 그림에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앞으로는 해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겠다고. 목표는 일단 10년이다. 그 이후를 염두에 두지 않은 건 하늘에 매였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에도 지난해부터 그린 스물여덟 점을 들고 왔다.
“이전까지 그림은 취미생활이었어요. 나를 송두리째 담지 않았어요.”
작가의 자신감에 ‘날개’를 달아준 건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재단은 이 작가를 올해의 ‘여성작가날개달기프로젝트’ 대상자로 선정, 전시 공간을 내주고 전시 준비부터 홍보까지 대행한다. 날개달기 작가 8명 중 ‘스페이스봄’에서 전시회를 갖는 첫 타자다.
이장으로 부녀회장으로
그의 인생길은 순탄치 않았다.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첫 결혼에 실패했다. 도시내기가 전라도 땅끝 인근까지 들어와 살며 눈에 보이지 않게 배타적인 이웃에 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돌이켜보니 그 삶이 상상력의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우연찮게 조폐공사에 취업했는데 몇 년간은 돈쓰는 재미에 살았어요. 그러다 어느날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고민했죠. 그림이었어요.”
당장 아마추어 작가의 길을 택했다. 스물다섯에 아마추어 작가로 개인전을 여는 ‘무모한’ 도전도 했다. 27살에는 추계예술학교에 입학, 정식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직장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매월리는 17년 전 목포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원동연 교수를 만나 새롭게 삶을 꾸리면서 선택한 곳이다. 농가주택을 구입해 생활하고 “채마밭을 일구며” 동화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친구들도 미덥지 않아 했어요. ‘3개월만에 돌아올 거야’라고 장담을 했다. 10년간은 정말 애를 먹었다. 문화적 차이가 가장 컸다. 주변에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 옥수수며 고추며 채마밭 일구기에도 금세 시들해졌다.
“1000원이면 둘이서 먹을 만치 상추를 살 수 있는데 왜 이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지어야 하나 싶었죠. 나이 들어 시골구석까지 들어와서 살아야 하는가 원망이 생기기도 했구요. 그림도 ‘돌파구’에 불과했어요.”
‘동네 사람’이 되기 위해 ‘이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0년 넘게 이장을 해온 동네 어른이 건강이 허락지 않은 상황이었다. 몇 년에 걸쳐 이장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웃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20여명 남짓 사는 조그만 동네가 두 패로 갈리는 듯했다. 외지인 심지어 ‘여자’가 이장을 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하나. 다른 쪽은 군에서 여성 이장을 장려하는데다 마땅한 인재도 없으니 원하는 사람을 시키자는 여론이었다.
“동네분들이 참 완강했어요. 무작정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 하고 싶어지는 거 있죠. 2년 전에 거의 명예직으로 이장을 하시던 동네 어른이 병으로 쓰러지고 더이상 할 사람이 없게 되자 시켜줬어요. 이장이 되고 나서는 우물 개량해 집집마다 상수관을 연결하고 마을 길을 넓히고 도로를 놓고 일을 많이 했어요. 그제서야 받아들이던데요.”
마을의 첫 여성 이장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1년 뒤 마을에 40대 초반 새내기 주민이 생겼다. 이주여성과 결혼해 귀농한 그에게 이장직을 넘겨주고 그는 부녀회장으로 ‘물러났다’.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며
작가는 모지스 할머니처럼 “나이들어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노래한다. 그같은 “작은 행복과 바람을 안고 화폭 앞에 선다”.
행복의 원천은 의외다. “가는 것”이다. 이정순 작가는 “내 인생의 석양도 저물어가는 해처럼 아름다움이 있었으면 하는 기대로 산다”며 “저물면서 빛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동지가 11년을 앞서 사는 남편이다. 남편은 그가 그림 그리는 걸 가장 좋아해주는 사람이다. ‘옆에 섰지만 한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함께 늙어가며 위로하고 산다. 전시장에서 만난 관람객들에게도 인생 선배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머리 하얀 부부들이 함께 바라보는 게 없으면 애정을 확인할 길이 없어요. 우리는 한 곳을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삶을 아름답게 꽃피우고 가자고 얘기해요.”
노부부는 작지만 큰 꿈을 품고 산다. 그 중 하나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화원예술제’를 여는 것. 3년 전부터 남편 제자들과 힘을 합쳐 동네 폐교에서 개인창작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해 주민들과 함께 첫 예술제를 열었다. 교실 두칸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지역 작가들 그림을 전시하고 노래와 춤이 있는 동네 주민잔치도 열었다. 다른 지역 작가들을 초청해 스케치여행도 떠났다.
“올해는 동네 아이들 그림과 유명 작가 작품을 함께 걸고 난타공연도 엮어 한바탕 잔치를 열고 싶어요. 돈은 어떻게든 길이 생길 거라고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어요.”
폐교를 창작실로 계속 유지하는 일은 좀 더 어렵고 큰 바람이다. 예술가들이 주머니를 털어 연간 600만원 가량 되는 운영비를 대왔는데 무명인 지역 작가들로서는 한계에 부닥쳤다. 외부 지원이 없으면 폐교는 정말 폐교가 될 참이다.
“폐교를 살려 지역 작가나 농촌의 자연을 담고 싶은 도시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요. 지역 작가들 그림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전시관도 만들고. 작가들이 힘을 합쳐 미술 소외계층인 동네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교와 목공학교를 열 계획도 있어요.”
이정순 작가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해준다는 걸 알았다”며 “전시회를 마치면 전남도청과 해남군청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로서는 예술가 지원에 어린이 예술교육, 나아가 관광자원까지 마련하는 셈이다.
“사실 남편이 오래도록 꿈꿔온 일인데 힘들 것 같아서 반대해왔어요. 그러나 이렇게 ‘날개를 다니’ 용기가 생겼어요. 그림을 좋아하고 화폭에 담고 발표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죠.”
백발이 성성한 화가는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렌다”며 소녀처럼 웃는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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