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2월 미국 뉴저지주 중심부에 있는 딕스 기지 데이비드 루이스 이등병은 콧물과 두통 오한을 호소했다. 그는 18살의 건강한 병사였다. 그는 행군도중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이른바 1976년 북미 인플루엔자의 첫 번째 희생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기지 군인들에게 인플루엔자가 급격히 번져 있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인척관계 = 미 방역당국은 딕스 기지 바이러스가 1918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가까운 인척 관계로 의심되는 바이러스였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1918년 독감 바이러스는 돼지 독감 바이러스로 의심될 만한 증거가 나왔다.
미 질병통제센터 관계자는 데이비드 루이스 병사가 죽은지 8일 뒤 돼지 인플루엔자로 병사 한 명이 숨지고 네 명이 감염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튼튼하고 건강한 젊은이가 독감에 걸린 지 며칠 만에 목숨을 잃은 점은 1918년 스페인 독감과 비슷해 보였다.
이후 보건의료당국은 빈약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독감 백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는 1918년 대유행의 끔직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당시 미 보건교육후생부 장관인 데이비드 매튜스는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독감인 1918년 독감이 재발할 것”이라며 “이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미국인 100만명이 목숨을 잃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예산당국자를 압박했다.
당시 포드 미 대통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상 최초의 전 국민 돼지 독감 예방 접종 프로그램을 국민앞에 발표했다. 예산은 무려 1억3500만달러에 달했다. 미국 인구 95%인 2억명에게 예방 접종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홍보가 시작됐다.
대유행 가능성에 대한 정확한 자료나 근거는 부족했지만 그해 10월1일 예방 접종이 시작됐다. 10일 뒤 첫 번째 사망자가 나왔다. 피츠버그에 거주하는 세 명의 노인이었다. 이후 예방 백신을 맞고 사망한 사례가 연이어 보도됐다. 이에 대해 보건당국은 “나이가 많고 지병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예방 접종을 실시하는 데서 발생한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단정했다.
◆불안감 속 4000만명 예방 접종 = 이후 불안감이 계속되자 포드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예방 백신 주사를 맞았다. 12월 중순까지 미국 성인 3분의 1인 4000만명이 예방 백신을 접종했다.
하지만 독감 백신 주사를 맞은 환자에게서 길랭바레 증후군이 나타난다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이 증후군은 처음에 손발이 저리다가 마비되며 몸의 윗 부분으로 마비가 퍼져 간다. 1~2주 내에 증상이 절정에 달했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약 5% 환자는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다.
미 미네소타주에서 예방 백신 주사를 맞은 여러사람에게서 이 증후군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 한 명이 사망했다. 이후 발병사실이 보도되면서 다음해 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인한 19건의 사망 사례를 포함해 67건의 억울한 죽음을 보상하라는 소송이 잇달았다. 당시 수백명이 돼지 인플루엔자 예방 접종을 받고 길랭바레 증후군이 발병했다.
재판과정과 회의에서 연구사례 공방이 벌어졌다. 미국 전염병 학회 주관으로 수차례 비공개 회의를 열고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돼지 인플루엔자 백신이 길랭바레 증후군을 유발한다고 말했다. 독감 전문가들은 드물지만 돼지인플루엔자 백신이 이 질병을 많이 일으킨다고 말했다.
◆수백명 길랭바레 증후군 앓아 = 많은 소동속에 1976년이 저물었다. 하지만 유행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 질병통제센터 수석 독감바이러스학자인 게이지 후쿠다 박사는 “1976년 교훈은 대규모 유행병이 발생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당장 총을 빼 드는 일(대규모 백신 접종)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보건의료 전문가들도 “1976년 미국 인플루엔자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중보건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우리 정부는 이번 추경 예산 833억원을 확보해 250만명분 항바이러스제와 130만명분의 신종 플루 백신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범현주 기자 hjbeo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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