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정부의 사교육비 경감 대책 논란.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면서 일단 정부 내 이견은 조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그동안 논란이 된 ‘학원 수업 시간 10시 제한’ ‘방과 후 학교 활성화’ ‘외고 입시안 개선’ ‘수능 과목 조정’ 등에 대한 안을 확정한 뒤 5월 말쯤 ‘사교육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문제는 교육 수요자인 학부모들의 반응. 사교육비를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문제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과연 이러한 정책들이 실효성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그 속내를 들여다봤다.
주말까지 학원행 당연한 수순 …
전두환 정권처럼 아예 금지시켜라?
이아무개(40·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씨는 며칠 전 학원 수업 시간이 10시로 제한된다는 얘기에 마냥 좋아하는 중학교 1학년 아들에게 딱 한 마디만 해줬다. “그럼 뭐 하니, 학원 수업이 더 빨리 시작할 테니 학원 차가 학교로 데리러 갈 테고, 아니면 주말반 수업을 들어야 할걸.” 이씨는 “지금은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2~3시간 쉬었다가 학원에 가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최근 서울시교육청의 ‘사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 시범학교로 지정됐다는 송아무개(40·서울 노원구 중계동)씨는 “학교에서만 바쁜 것 같고 엄마들은 불신이 더 큰 상태”라며 “학교에서 준 스케줄을 보니 지금 다니는 학원 시간대랑 겹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고, 학원 강사들을 초빙해 소수로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학원만큼 관리가 될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학원 심야 교습 시간이 제한되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특목고 입시학원과 고등부 학원들은 초비상이 걸린 상태. 혼란스럽기는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외고 입시를 준비한다는 최혜영(42·서울 금천구 시흥동)씨는 “지금도 특목고 준비반은 주말에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주중에 하던 수업이 주말로 옮겨지면 타임만 늘어나 아이들이 제대로 쉴 시간이나 있을지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반면 아이들의 건강이 위협받는 수준인데다 갈수록 늘어나는 사교육비에 부담을 느끼는 엄마들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겠냐면서 반가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방과 후 학교가 능사? 글쎄…
엄마들이 학원 심야 교습 제한보다 의구심을 나타내는 대목은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방과 후 학교 활성화 문제.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신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얼마 전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한 방과 후 학교 수업이 얼마 못 가 흐지부지됐다는 권아무개(36·서울 영등포구 신길4동)씨. 원어민과 교포 출신 교사를 영입해 저렴한 가격에 수업을 제공했지만 엄마들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수강생이 별로 없으니 강사료 대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바뀌더라고요. 악순환이죠. 성적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사교육을 완전히 놓기는 힘들어요. 아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을 엄마가 얼마나 되겠어요.”
강남 지역에 살면서도 딸아이가 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걸 편하게 느껴 온라인 강의만 듣게 한다는 최아무개(40·서울 서초구 양재동)씨. 얼마 전 수업료도 입금한 방과 후 학교가 한 달 만에 없어지는 걸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지역 교육청에서 압력이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거의 반강제로 수강하게 했어요. 근데 애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선생님이 잘 가르치는지 딱 보면 알아요. 어떤 분은 너무 의욕만 넘쳤는지 기본 개념부터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특목고 대비 문제만 가져와서 풀라고 했대요. 우리 애는 체력도 약한데 귀가 시간이 늦어지니 한 달 동안 계속 멍한 상태였어요. 이런 식이면 학원에서 시달리든, 학교에서 시달리든 다를 게 뭐가 있나요?”
본말 전도, 뿌리 깊은 공교육 불신부터 해결해야
곽승준 위원장의 발언이 논란이 됐을 때 정치권과 교육·시민 단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온 지적은 뜻은 좋지만 원인 분석과 해법이 잘못됐다는 것.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만 매몰되다간 본말이 전도될 수 있으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공교육 강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엄마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딸이 공부는 꽤 잘했지만 사교육은 창의력을 높여주는 데 중점을 뒀다는 유아무개(40)씨. 내심 다른 엄마들처럼 영어, 수학 선행 학습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자신이 뿌듯했다. 하지만 뿌듯함은 얼마 못 가 후회로 바뀌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인데, 선행 학습을 끝냈다는 걸 전제로 수업을 하신다는 거예요. 필기는 아예 없고 자습서를 그대로 복사한 프린트물만 내주는 경우도 많고. 아이가 교과서에 ‘○○에 대해 알아봅시다’라고 나오는 게 제일 싫대요. 토론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습서에 나온 부분 복사해 책에 붙이라고 하는 게 전부니까. 이래서 상위권 애들이 중3 과정까지 끝내고 입학하는구나 절감했죠.”
앞서 최아무개(40·서울 서초구 양재동)씨의 의견도 마찬가지. 기본을 바로잡기보다 주변만 보는 것 같아 불만이 많다.
“물론 열의를 갖고 수업하는 선생님들도 많으세요. 하지만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은 5교시 내내 서예만 하다가 수학은 동영상 강의 틀어놓는 걸로 수업을 마쳤대요.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한 한 엄마는 고등학생 때 모르는 문제 들고 선생님 찾아갔다가 ‘교과서에 없는 문제를 왜 물어보느냐’고 면박만 당했다더군요. 왜 정규 수업의 질을 높이는 문제를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고, 학원과 대립각을 세우거나 방과 후 학교만 부여잡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아무개(38)씨는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이 주변 엄마들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아이와 같은 반이 된 것을 알고, ‘○○랑은 인사만 하고 다녀. 예전에 친구 많이 괴롭혔대’ 하고 포석을 깔아뒀다. 그런데 며칠 후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엄마, 나 ○○랑 친해졌어. 나랑은 잘 맞아’ 하고 말해 가슴이 철렁했다. 좀더 아이 판단에 맡기고 지켜봐야 할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떼어놓아야 할지 조마조마하다.
이아무개(43)씨는 얼마 전 지옥 같은 사흘을 보냈다. 중2 아들이 반 친구에게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받은 사실을 직접 학교에 알리면서 사태가 심각해진 것.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혹시 2차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렵다.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말보다 내 아이 판단 존중
가까이 지내지 말았으면 하는 아이와 내 아이가 친해졌을 때, 무조건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이에 대한 소문은 성향이 다른 몇몇 아이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부풀려진 단면일 수도 있다.
인천광역시 청소년상담지원센터 홍나미 팀장은 “실제 가해 정도가 심한 아이라 해도 감싸 안아야 할 대상이므로 무조건 친해지지 말라고 하기보다는 아이의 판단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애가 정말 좋아하는 마음으로 친해지려고 접근하는 건지, 의도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인지는 아이가 더 정확히 판단할 수도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돈을 가져오라’는 식의 협박에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한두 번 갖다 주면 더 요구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 부모에게 말하라’고 평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는 가해 아이의 요구에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때 부모의 처신도 중요하다. “부모가 바로 가해 아이에게 연락해 따지거나 화를 내면 반항심을 부추길 수 있다. 그 아이에게 어떤 상황인지 차분히 묻고, 내 아이가 두려워하는 마음도 신경 써준다. 개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면 담임교사와 통화해 자초지종을 전하고 선생님의 역할에 의지하는 게 적절하다”는 게 홍 팀장이 권하는 대처 요령이다.
학교에 알리면 일이 더 커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을 교사나 학교에 알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가해 사실을 발설했다는 것으로 또 다른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따르게 마련.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담임교사에게 알린 장아무개(41)씨는 가해 학생과 대화한 뒤 담임 교사에게 가해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가해 아이들은 선생님 눈 밖에 나기 쉬운데, 그럴수록 관심을 가져줘야 반 아이들 모두 안정된 분위기에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 내 아이의 2차 피해 우려보다 가해 아이부터 따뜻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내 아이 마음 달래는 것 못지않게 가해 아이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가해 아이에게 피해를 당한 사례가 많아 동조하는 분위기라면 보복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주변 친구가 도와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 또 가해 아이들은 한 명에게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아이에게로 옮겨가는 게 보편적인 성향이다.
홍 팀장은 “가해 아이가 ‘너 때문에 일이 커졌다’고 다시 접근할 경우, ‘그건 네 잘못에 대한 꾸중이지 내가 알려서 생긴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도록 연습시켜야 한다. 내가 아니라도 생길 수 있는 문제며, 널 괴롭히려고 이른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전할 것”을 강조한다. 덧붙여 “가해 아들은 자기주장을 명확히 하고, 싫다고 표현하는 아이는 건드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자녀에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훈련과 명확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유정 리포터 meet1208@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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