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芝鄕 이숙자의 ‘삶과 색’

보리밭에서 이브까지, 한국적 미학에 천착하다

지역내일 2008-11-07

고양시에 사는 즐거움의 하나라면 많은 예술가들이 바로 우리 이웃이라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덕분에 아주 가까이에서 대가의 작품이나 공연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1월 1일부터 12월 14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숙자의 삶과 색-한국 채색의 재발견’은 한국 채색화의 현대적 해석으로 미술계의 한 획을 긋고 있는 미술계의 대가 이숙자 화백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 이 화백은 10여 년 넘게 중산동의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31일 전시에 앞선 오프닝 행사로 바쁜 이숙자 화백을 아람미술관에서 만났다. 평생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려 온 작가에게 세월도 비껴간 것일까? 1942년생, 40년 넘게 한국채색화의 전통성과 현대적 해석에 천착해온 작가의 모습은 그가 그린 청보리처럼 청정하고 이브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대 시절부터 한국화, 그 중에서도 사실화 계열의 채색화에 천착해 왔다. 1972년 제21회 국전 특선 수상을 시작으로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 장려상을 수상했으며 1980년에는 중앙미술대전 대상과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1994년에는 제5회 석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20여 회의 개인전과 수십여 차례 초대전과 단체전을 가진 바 있는 그는 고려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여 년 넘게 보리밭과 이브라는 주제에 매달려왔다. ‘보리밭과 이브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잊혀져가는 한국의 전통 채색화를 고수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재창조시킨 대표적인 한국화 작가로 평가된다.
그동안 작가의 많은 전시회가 있었지만 아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초기 작품부터 완숙의 경지를 더욱 생동감 넘치는 보리밭으로 표현한 최근작까지 시대별 특징이 드러나는 80여 점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데 그 의미가 깊다.
한국 채색화의 현대적 계승,
한국적 미학의 정체성 추구
이숙자는 한국미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 작가이다. 우리의 전통 회화는 수묵과 채색이 공존해왔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채색화는 우리의 전통과 무관하게 일본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인식되어 해방 이후 미술계에서 배척되어왔다. 이런 사회 풍조에서 한국 화가들은 한국의 전통회화로 수묵화를 주로 그렸고 주요 미술대회의 수상도 이들이 선점하면서 수묵화가 점차 한국화의 주류처럼 보여 지게 됐다.
그러나 작가는 채색화가 삼국시대의 고분벽화, 고려시대의 섬세하고 화려한 불화, 그리고 조선시대 민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으며 명목을 유지해온 전통적인 한국화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천경자, 박생광 선생에게 한국의 전통적인 채색 기법을 습득하고 김기창 선생에게 사군자를 직접 사사 받으며 한국적 미감을 전통적인 채색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 한국의 채색화는 아름다운 색채를 드러내는 재료의 속성 때문에 매우 오랜 인내와 시간, 그리고 장인적 기질을 요구한다. 작가는 몇 년씩 걸려 한 작품을 완성할 정도로 열정과 집념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보리밭과 이브에서 한국적 서정을 만나다
작가의 그림에서 전환점이 된 보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7년 우연히 경기도 포천에서 청맥밭을 만나면서부터. 이후 10여년 넘는 긴 시간동안 보리이삭과 보리수염의 끊임없는 탐구로 보리알 하나하나까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작가 특유의 부조기법을 창조하게 됐다. 이 기법은 전통적인 채색 안료인 석채(石彩)를 이용하여 선명한 색상과 입체적인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으로 작가의 보리에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없는 장려상 수상과 1980년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한 작품도 보리였을 만큼 작가에게 보리밭은 늘 새로운 감동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주제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작가의 동경은 여성 누드화 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 누드화는 여체를 꽃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작가의 심경이 담겨있다. 작가는 여성의 음부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대해 음부를 식물로 표현하자면 꽃이 되기 때문에 가리면 그림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적나라하게 체모를 드러내고 건강하게 자연의 일부로 몸을 드러낸 이브는 남성주의 시각에서 바라본 곱고 다소곳한 감상용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만물이 소생하는 대지의 여신이자 어머니로서의 강인한 여성이다.

이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보리밭과 이브의 작가로 불리지만 그가 보리밭과 여체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90년대에 훈민정음과 석보상절의 판본체 디자인의 미적 감각에 주목하여 <훈민정음과 황맥,="" 청맥=""> <석보상절> 등의 연작으로 보리밭을 중심에 두되 그 변주를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했으며 군우 시리즈, 일하는 여인 시리즈는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그가 북한여행을 통해 제작한 <백두산>은 14.5m에 이르는 화폭 속에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장대한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작이다.
“내 그림이 보리밭과 인체누드로 집약되지만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또 어떤 주제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작정은 없다. 보리밭과 이브도 한국적 색채를 가장 미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업이었을 뿐”이라는 작가는 앞으로도 한국적인 미적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테마를 찾아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의도적이 아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이숙자 화백. 이번 가을 여러 기관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귀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특히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 등, 이번 전시는 한 예술가의 개인적 삶과 창작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 문의 1577-7766)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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