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11일 스페인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예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집안도 중류층에 속하는 비교적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달리'라는 이름이 자신이 태어나기 3년 전에 이미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는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부모님에게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일 하였노라"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어린 달리를 신비의 혼란 속에 빠지게 했다. 그가 평생을 두고 늘 불안한 정신상태를 보이며 때로 격렬한 폭발을 보인 것도 어린시절의 일들의 영향이 크다. 후에 그는 "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늘 증명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반정부 활동으로 잠시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겼고 차츰 무정부적인 타락된 생활이 심화되어 결국 1926년 퇴학 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927년은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바로 20세기 미술의 거장 피카소를 만나게 된 것이다. 파리로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놀라운 변모를 보이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도 그에게 구애되지는 않았고 미로와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달리의 작품 속에는 현대인이 지닌 갖가지 고민 불안 모순 공포 절망 등이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2중·3중으로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화면에 표현하는 것이다.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부인인 갈라가 출현한다. 모든 여성의 모습이 갈라로 표현되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모습까지도 갈라의 형상으로 대신되었다. 달리는 그것은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한 것이 바로 부인인 갈라였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26살 되던 해에 달리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인 갈라를 만나게 되고 운명적인 사랑을 직감한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들 부부를 초청한 달리는 돌발적인 웃음과 이상한 행동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했다. 갈라 역시 그러한 그의 열정에 못 이겨 그에게 이끌리고 만다.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그녀야말로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믿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1929년 말 파리에서의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나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고 급기야는 조그만 방을 구해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타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노한 아버지는 그에게 절연장을 보낸다. 달리는 그 충격으로 삭발을 하다만 채, 먹다 남은 섬게 껍질과 함께 그 깍아버린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고 말았다. 그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른 아버지와 가정을 묻은 것을 의미하였고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보다 정신적이며 숙명적인 갈라를 얻은 것이다. 그는 그녀로 인해 참다운 달리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고유나 리포터 yn12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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