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속에는 가을꽃의 덕목이 숨어있다

지역내일 2008-08-15
노블카운티 입주자 동호회 선선회(扇仙會)

우연한 첫 만남
선선회(扇仙會)를 알게 된 것은 단오가 있던 6월 초였다. 부채전시회가 열리는 노블카운티 생활문화센터 내 지하전시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별다른 기대가 있진 않았다. 둘러보니 벽면에는 부채들이 가득했다. 부채들은 작가별로 무리지어 전시됐는데, 작품 수도 많았지만 무척이나 다양했다. 전통적인 사군자가 수묵이나 담채로 그려진 부채에, 시가 적혀 있기도 하고 물고기가 하늘을 날며 유화가 연상되는 강렬한 빛깔로 채색된 부채까지 한 자리에 놓여 있었다. 부채를 보고 있노라니, 이 부채들을 그린 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목요일 오전은 선선회 회원들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다. 저마다 화구를 펼쳐놓고 그림에 빠져 있는 모습은 인터뷰 전 예상했던 구도가 아니었다. 선생님처럼, 친구처럼, 손녀처럼 회원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외부강사의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하나 망설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질문에는 성의껏 답변하는 모습에서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부채 속에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더 흔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더운 여름날 시원한 부채바람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부채에는 사람의 손맛이 있다. 부채를 만들고 그린 이의 손맛, 부채를 부치는 이의 손맛이. 그런 맛에 자연스런 멋이 더해지면 신선이 따로 없다. 선선회는 ‘부채 선(扇)’과 ‘신선 선(仙)’을 사용한다.

윤경의 회장은 “선선회는 03년 단오 때 6명이 모여 만든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6회 정기전시회를 열었고, 회원은 20여 명으로 늘었다. 작년부터는 노블카운티 내 전시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전시가 이뤄졌다. 올해도 정기전시회를 마치고,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작품전시회를 가졌다.

선선회 회원들은 부채의 매력에 대해 “일반 그림처럼 액자를 갖춰 표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내가 그린 그림을 쉽게 나눌 수 있다”고 했다. 허명자 회원은 “부채 그림은 부채살이 있어 일반 그림과는 다른 표현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시, 서, 화에 능한 옛 선비들은 부채를 선물했다. ‘고려선’은 외국에서도 높이 평가됐다”며 유정혜 회원이 부채그림의 배경에 대해 들려줬다.

올해도 50여 개의 부채에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선물했다는 허명자 회원처럼 선선회 회원들은 1년 동안 부채그림을 구상하고 작품을 만든다. 초기에는 부채크기만큼 종이를 잘라 연습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바로 그릴 수준은 되었다는 회원들은 언젠가는 합죽선에 작품을 그릴 날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시인이기도 한 김정완 회원의 부채 작품에는 시구(詩句)가 제목으로 붙어있다. 시와 그림에 대해 묻자, 그녀는 “시에는 삶을 관조하는 깊이가 있고, 그림은 이제 막 시작해 모방 정도의 단계라 새로운 분야에 대한 흥미로 다가온다”고 했다. ‘엄마 좋아, 아빠 좋아’ 와 같은 리포터의 우문에 대한 현답이다.

유정배 회원은 “몇 년 전 쇼크로 인해 손이 떨리는 등 없던 증상이 생겼다. 그림에 집중하다 보니, 전보다 불편함이 줄었다”고 전했다. 이상선 회원은 “앞선 작품보다 뒤에 그린 그림이 나아지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며 배우는 기쁨을 표했다. 부부회원인 문해순 회원은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남편과 보내는 일상을 들려주어 회원들의 부러움을 샀다.
선선회 회원은 60대 이상 어르신이다. 앞선 사람으로서 젊은이에게 이들은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궁금했다. 유정혜 회원은 “다양한 취미를 가지면, 나이 들어 변화에 적응하기 쉽다”고 충고했다.

선선회의 부채에선 가을꽃이 느껴진다. 봄볕과 장마,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고 피는 국화나 코스모스처럼 부채 속엔 그림을 그린 이의 지나간 세월이 담겨있다. A4용지 정도의 크지 않은 면적에는 삶과 꿈, 소망, 아쉬움과 함께 그리움마저 녹아 있다. 세월을 견디어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함과 지혜로움도 그 안에 숨어 있다.

김선경 리포터 escargo@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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