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26.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사찰들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피어난 아름다운 건축들

지역내일 2001-06-01 (수정 2001-06-11 오후 2:03:36)
중종 10년(1510) 3월, 서울 장안 어디서나 바라보이던 흥천사 사리탑이 불에 탔다. 화재 원인은 방화였다. 유생들이 이단을 쓸어버린다고 불을 지른 것이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각은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4~5층의 건물로 태조 이성계가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조성한 탑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있던 흥천사는 태조 6년(1397)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 창건된 170여간의 대사찰로 조계종의 본산(本山)이었다.
계비 강씨의 능은 지금의 영국 대사관 자리로 짐작되는데, 태조는 흥천사 건립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몇 차례나 현장에 들러 일꾼들을 격려하고 재물과 식량을 지급하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태종 9년(1409) 정릉이 지금의 자리인 북한산 기슭으로 옮겨지고 나서도 흥천사는 도성 안의 주요 사원으로 남아 있었다. 태종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제한하고, 전국의 242개 절만 남겼으며 사찰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흥천사를 잘 보호하라는 태조의 유언에 따라 흥천사만은 그대로 법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종 31년(1449)의 큰 가뭄 때는 이 절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며칠 후에 비가 내려 세종이 승려 140명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왕실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흥천사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에는 불이 나서 전각이 거의 타 버리고 사리탑만 남아 있었는데, 중종
10년에는 이 사리탑마저 유생들의 방화로 불타고 만 것이다.

‘야단법석’ 대신 법당 안의 예불로 조선조 이후 불교는 사대부들의 위세에 눌려 크게 위축되었다. 사찰들은 대부분 재정적 기반을 잃었으며, 각 종파는 강제적인 통합을 강요받았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을 크게 제약받았다.
그나마 조선 초에는 왕실의 보이지 않는 후원 아래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16세기 중종조 이후 사찰들은 견디기 힘든 탄압의 시기를 맞는다. 과거시험에서 승과가 폐지
되고 선종과 교종의 구분도 사라졌다. 승려들은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고 온갖 국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16세기를 지나면서 도시사찰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지방의 조그만 산간 사찰들이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들은 폐쇄적이지만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유기적 공간구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 대웅전을 신도들의 예불장소로 개방하는 등 불전 실내공간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열어나갔다.
이런 현상은 산간의 소규모 사찰이나 일반 신도들의 출입이 잦은 일부 사찰의 현상이었지만, 다음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보편화되는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고려시대의 ‘야단법석(野檀法席)’과 같은 대규모 법회가 불가능해지면서 법당 안에서 치르는 간소한 의식이 차츰 많아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임란 이후 왕실 후원으로 중창불사 임진왜란은 사찰에 더욱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사찰들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승병을 조직해서 맹위를 떨친 휴정(서산대사)이나 유정(사명대사)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와서 승려들에 대한 나라의 대우가 달라지기도 했다.
실제 임란 직후 30~40년 동안 진행된 유명대찰의 복구사업에는 왕실의 시주가 큰 힘이 되었다.
송광사가 재건되었고 부석사나 해인사, 화엄사 같은 신라 이래의 큰절들이 이 때 복구되었다. 3층전각인 금산사 미륵전과 5층 목탑 형식의 법주사 팔상전이 다시 지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복구된 건물들은 대웅전처럼 사찰의 중심 불전이거나 특별히 그 절을 상징하는 중요한 전각들이 많았다.

각층마다 구조기법이 다른 팔상전 중창은 대부분 불타기 전의 모습을 재건하는 수준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예전의 규모나 겉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축소되거나 간략화된 형태로 복구되기도 했다.
전란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본격적으로 건물을 복구할 만한 여력이 없었고 목재공급도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층 전각을 단층으로 재건하거나, 크고 화려했던 팔작지붕 건물을 소박하고 목재가 절약되는 맞배지붕으로 바꾸어 짓기, 여러 건물의 자재를 한 건물로 모아서 재활용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
1626년에 다시 지어진 법주사 팔상전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통일
신라시대에 조성된 기단 위에 사방 5칸의 5층 목탑을 기단이 꽉 차게 앉혔는데, 각층의 공포
부분을 자세히 보면 층마다 그 조성수법이 다르다.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1층은 ‘주심포’식으로 헛첨자를 둔 형식이고, 2층에서 4층은 기둥
위에만 포를 짠 형식, 5층은 평방까지 갖춘 완전한 ‘다포식’으로 지어져 있다. 전체적인
통일성보다는 형편에 따라 각층에 맞는 형식을 적절하게 구사한 것이다.

중심기둥을 여러개의 나무로 1636년에 중창된 금산사 미륵전도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적 상황이 그대로 반영된 건물이다.
원래 금산사에는 3동의 3층 전각이 있었으나 임란 이후 미륵전 1동만 재건되었다. 미륵전은
높이 12m에 이르는 미륵불상 ― 현재의 미륵불상은 일제강점기 때 불타버려 1938년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 을 모시기 위해 지붕을 3층으로 꾸몄는데, 큰 재목이 부족하여 헌 자재를
짜맞추어 건물을 구성했다.
이런 사실은 1986년의 정밀조사와 구조안전진단 과정에서 자세하게 밝혀졌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거대한 전각을 지탱하고 있는 중심기둥(내진고주·높이 14m)이 2~3개의 부재들이
짜맞추어진 합성재목이라는 것이다.
중심기둥을 하나의 통나무로 세워도 나무자체의 수축변형과정에서 건물에 많은 편차가 생기는데, 2~3개의 부재를 연결한 내진고주(중심기둥)에 모든 구조부재가 결구(연결)되어 있으니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결국 17세기 이후 7차례에 걸친 중·개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물 모퉁이 추녀 부분이 조금씩 처져서 건물 형태 전체가 둔중해지는 변형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임란 직후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인 조건에서 이런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의 보존과 중심기둥 문제는 이제 우리 후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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