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제는 다민족 사회로-21세기 신한국인 결혼이민자](18)반시 아나린씨 가족의 고향 방문기

“온 가족이 필리핀 친정에 다녀왔어요”

지역내일 2007-08-20
한국 농촌에 시집 온 결혼 이민자들의 사회 적응력을 높이는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농협문화재단에서 ‘농촌여성결혼이민자 모국방문’을 지원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재단은 결혼이민자 200세대 793명을 이들의 왕복항공비를 전액 지원했다. 또 가정당 50만원식의 체재비도 더했다.
재단에 따르면 이번에 선정된 결혼이민자들의 출신 국가는 중국이 104세대로 가장 많았고 필리핀(78세대) 베트남(12세대) 태국(2세대) 그리고 캄보디아 일본 인도네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이 각 1세대었다.
지난 13일 재단 도움을 받아 필리핀 고향을 가족과 방문하고 돌아온 반시 아나린씨와 가족을 만나 이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봤다.

농협에서 모국 방문 지원 … “이웃들이 잘 챙겨 줘 감사”

지난달 28일 반시 아나린(Bansi Analyn. 35)씨는 설레이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필리핀에 있는 친정집 방문을 앞뒀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친정 나들이는 남편, 세 아이와 함께하는 첫 방문이라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 동안 비용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는 고향 방문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남편 김관회(46)씨는 이번 방문으로 아내의 친정 식구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4일 꿈같던 필리핀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은 다시 농촌의 일상으로 돌아았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라진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 남편 김씨는 “엄두도 내지 못 하던 온 가족의 필리핀 방문을 가능하게 도와준 농협, 이장님, 이웃들이 너무 고맙다”며 “함께 지낸다는 공동체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혼 8년만에 가족과 함께 친정나들이 = 한국 농촌이 좋다는 반시 아나린씨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땐 낯선 곳에서 살아갈 일들이 두려웠다.
아나린씨는 “99년 남편을 만나 한국에 왔는데 말이 안 통하니까 많이 답답하고 힘들었다”며 “처음 5년은 남편과도 많이 싸웠다”고 말했다. 아나린씨는 자신이 힘들고 답답해도 남편이 잘 이해해주지 못하고, 김씨도 11년 연하의 필리핀 아내와 잘 소통이 안 돼 술을 마시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하지만 부부는 아이를 가지면서 안정을 찾았다. 소현(6) 소진(4) 태진(3) 삼 남매는 아나린씨가 두 아이를 유산한 후 얻는 아이들이다. 아나린씨는 “애들 낳고 애기 아빠가 잘 한다”고 말했다. 아나린씨 부부는 가족이 많다. 15남매 중 막내인 아나린씨와 7형제 중 셋째인 김씨는 가족들이 많은 게 좋다. 김씨는 “셋째 아이도 그냥 낳았다”며 “정부에서 지원도 많이 해서 셋째가 태어난 뒤에는 육아비용도 상대적으로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닌다.

◆“아내의 나라도 소중하다” = 열두살때부터 쟁기질을 배우면서 농사일를 시작했다는 김씨는 필리핀인 아내를 사랑한다. 그는 아내가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결혼 후 처음 3년동안 매년 한 두 달씩 아내를 필리핀 고향에 다녀오게 했다. 2003년 어머니상을 당한 아내와 함께 필리핀에 다녀오기도 했다.
김씨는 넉넉하지 않은 생활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남부럽지 않게 지내도록 하고 싶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내의 고향 방문은 거의 끊겼지만 가족과 자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아나린씨도 남편의 이런 노력이 고맙다. 아나린씨는 “때때로 가족과 함께 강원도 경주 에버랜드 등에 놀러 간다”며 “동네 아주머니들과도 함께 다니며 사이좋게 지낸다”고 말했다.
난생 처음 필리핀에 있는 외가집에 다녀온 여섯 살 소현이는 “필리핀에 가서 이모랑 재밌게 놀았어요”라며 또 다른 친척들과의 만남을 기뻐했다. 네 살 소진이는 “비행기 타고 갔다와서 좋았어요”라며 연신 자랑이다.
아나린씨는 지난 2003년 한국 국적을 얻었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꾸려 했다. 하지만 남편 김씨가 반대했다. 김씨는 “아내에게 부모님이 주신 필리핀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한국 농촌 지키고 싶어요”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있는 대학(System Technology Institute College)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아나린씨는 마을에서 부쩍 인기가 높아졌다. 남편 김씨도 아내를 인정하는 주변의 변화가 싫지는 않다. 김씨는 “영어 필리핀어 한국어가 가능한 아내에게 강사를 제안하는 학원들이 생기고 있다”며 “필리핀에서 영어 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나린씨는 “농사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했다. 논 3000여 평을 포함해 모두 5000여 평의 농사를 짓고 있는데 쉴틈 없이 바쁘다는 게 이유다. 아나린씨는 “밭에 고추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을 다 심었다”며 “도시는 사람이 많고 공기도 좋지 않아, 농촌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아나린씨는 이번 고향 방문으로 자신이 한국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남편도 2~3년에 한 번씩은 고향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혼 후 필리핀 출신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아이들이 주변에서 따돌림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 한국말이 서툴러 아이들이 말을 제 때 못 배울까 걱정도 했지만 아이들은 염려없다는 듯 한국말을 잘 한다.
아나린씨는 “이번 고향방문에서 언니 오빠들을 다 만나진 못했지만 엄마처럼 따르는 큰 언니를 만나 너무 행복했다”며 “남편의 공약이 헛되지 않도록 자신도 더 열심히 생활하겠다”고 다짐한다.
이천 =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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