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을 세계적 축제로 성공시켜 … 1100여회 재즈, 월드뮤직 제작 공연
글로벌화는 개인이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와 교류하고 거래하는 비중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있다. 진정한 세계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와 교역기회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이 앞서 국제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교류의 실크로드를 새로 만들어낸다.
한 개인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며, 자신이 머물게 된 작은 지방에서 전 세계를 초청하여 만나려는 당돌한 사고는 진정으로 글로벌하다. 자신이 공연기획자로서 관계를 맺어온 세계의 재즈아티스트를 동원하고 가평이라는 작은 지자체를 설득하여 국제적인 재즈페스티발을 만들어간 인재진의 사례가 그렇다. 바로 옆 도시 춘천에서 15년에 걸쳐 일개 마임 예술가와 소수의 민간인들에 의해 국제마임축제의 아시아본산이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세계를 만나는 쾌감은 확실히 미래적이다.
‘재즈 사과’를 따다
그가 새로이 사과나무 과수원 주인이 된 것은 2005년 정월이다. 무모하게도 경기도 가평군 개곡리 산자락에 있는 지목 3000평의 사과 과수원을 3년 동안 임대한 것이다. 당초에 재즈음악을 틀어서 470그루의 사과나무를 재배하겠다는 유별스러운 계획을 세웠으나 첫 해에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사과를 수확하겠다는 엉뚱한 발상은 그다운 몽상과 심모원려에서 나왔다. 그는 땅 밑을 관통하는 지하수의 자양분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 그루의 과수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은 꽃병에 꽂힌 절지가 아닌 바에야 지하수의 자양에 힘입은 까닭이 아닌가.” 바람이 찬 이른봄부터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과수원에 나가 힘겨운 노동을 했다. 요즘 농촌에는 돈을 준대도 일할 사람이 없어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한다. 가지치기를 한 자리들을 일일이 골라 붓으로 항균제를 바르고 농약은 열네 번 쳐야하는 것을 여섯 번 뿌렸다. 사과 꽃이 활짝 피자 벌들이 윙윙거리며 꽃가루를 옮겨 수정을 도왔다. 막 사과 열매가 달리던 5월에는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져서 많은 열매를 곰보로 만들어버렸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자양분과 광합성의 결실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2005년 첫 해에 그는 여름 사과인 아오리종 30상자와 가을 사과인 부사종 300상자를 수확했다. 사과 이름은 ‘자라섬 재즈 사과.’
그에게 과수원 길은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는 목가적인 과수원 길이 아니다. 그는 국제음악인 재즈를 가평의 자라섬에 토착시키려면 먼저 스스로를 토착화시켜야 한다는 꿍꿍이속으로 현지 사과를 재배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왜 그는 세계화한 재즈 음악을 메트로폴리탄이 아닌 일개 향촌에 심고자 하는가.
세상을 거꾸로 가면서 앞길을 개성적으로 좇는 즉흥적인 몽상가. 세계화한 재즈를 향토화한 재즈로 치환하려는 총알 탄 사나이. 국내에 한 사람뿐인 ‘재즈페스티벌기획자’. 인재진은 어떤 생각이 퍼뜩 나면 즉흥적으로 뛰어들고 보는 웃기는 사람이다.
‘지구’가 ‘자라섬’으로 오다
“‘글로벌’이 ‘로컬’로 온다”고 한다. 이것은 인재진이 구사하는 문화 기획전략의 핵심어이다. 그는 과수원 경영자를 포함해서 공연기획자·음반제작자·극장 경영자·해외공연 매니지먼트전문가·도서출판가·자라섬재즈페스티벌 예술총감독·대학 겸임교수 등 여덟 가지 직업을 겸임한 팔방미인(멀티태스커)이다.
그러나 그의 직업 브랜드는 ‘재즈축제기획자’이다. 국내에 한 사람뿐이고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재즈축제기획가, 유럽 재즈축제공연계에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재즈축제기획가. 그가 자기 전문 브랜드를 확고하게 굳히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이다. 인재진이 비중 있는 외국 연주자 13개 그룹과 국내 연주자 17개 그룹을 초청하여 제1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연 것은 2004년이었다.‘ 축제기간 사흘 중에 첫날은 2만 명이나 되는 관객이 들어 쾌재를 불렀건만 남은 이틀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 그 탓에 축제의 성공예감은 날개를 접고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가평군의 지원금도 흡족하지 못한 터여서 몽상가 인재진은 ‘피를 많이 봤다.’ 1억 여 원의 개인 적자를 보았으나 넘어지고 일어서기에 이력이 난 그는 태연했다. 제2회 재즈 페스티벌에 기를 모으기 위해서 오히려 사과나무 과수원 주인이 되는 새 몽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취주악부에서 취미로 색소폰을 불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 초반에 그는 색다른 아이디어를 짜냈다. 결혼식장에서 축하연주를 하는 음악 용역사업이다. 아직 아무도 착안하지 않은 일이었다. 음악대학 아르바이트 지망자를 모아 현악 3중주단, 금관 5중주단, 목관 5중주단을 짜서 결혼식장에 출장을 보내 축하음악을 연주케 했다. 결혼 성수기인 10월에는 하루에 10여조의 연주단을 돌릴 정도로 성업이었다. 뒤이어 연주 영역을 장례식장으로 넓혀가다가 프로축구 개막식 등 각종 행사에 연주 인력을 공급하는 토털이벤트 서비스 사업으로 확장했다. 한 달에 1000만 원이 넘는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인재진은 음악연주 용역을 하는 3년 동안에 “음대생치고 나를 거쳐가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고 호언한다. 그가 재즈 음악의 명인인 강태환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강태환은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뛰어난 음악성으로 독특한 동양적 감흥을 표현해 내는 세계적 자유음악 색소포니스트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 인재진은 한쪽으로 벌고 한쪽으로 털어먹는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아이디어를 내서 돈도 잘 벌고 그 돈을 다른 아이디어를 실험하는데 써버린다. 그는 아주 즉흥적이고 무모하게 일을 꾸민다. 난데없이 중국 스촨성 성도인 청두(成都)의 ‘목각인형그림자극단’을 초청하여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손오공 대모험’을 한달 동안 공연하다가 크게 실패했다. 2억 원의 적자를 내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인재진의 사람됨은 별난 데가 있다. 큰 적자를 보면서도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중국 극단 사람들과 신뢰관계를 유지하니, 김포공항을 출국할 때 23명의 단원들은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인재진의 생일이 오자 중국 청두에서 ‘엄청난 양의 선물’이 배달되었다. 그는 낮에는 코엑스 앞에서 어묵행상을 하고 밤에는 고속터미널 앞에서 자가용 영업을 하는 바닥 생활도 거쳤다. 홀연히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미국에서 무슨 지랄인가”하고 퍼뜩 정신이 들어 바로 짐을 싸들고 돌아온 사람이다. 접시 닦기질로 끝이 난 미국 생활 7개월이었다.
공연기획에 나선 인재진의 첫 실험장은 객석 100개의 ‘딸기극장’이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월세 70만 원짜리 소극장을 대관해서 ‘딸기극장’이란 이름을 붙이고 재즈연주 공간으로 운영한 것은 1998년부터 2000년 1월까지이다. 그는 독특한 컨셉의 실험극장을 운영했다. 요일별로 유망한 아방가르드 중심의 아티스트를 초청하여 상설공연을 시행한 것이다.
“강태환 선생을 만나면서 재즈의 소명감이 생겼다. 그분은 대단한 세계적 연주자인데도 예술과 삶이 소박하여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 일이 새로운 것이어서 애정이 생겼다.” 그가 재즈연주기획 방면에서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은 그때였다. 건물주가 바뀌어 문을 닫기까지 ‘딸기극장’은 쉬지 않고 공연하여 한국 재즈연주의 메카로 각인되었다.
재즈 추임새
강태환은 평한다. “인재진은 굉장히 어려운 가운데 소극장을 운영해서 좋은 연주자를 초청공연 하는 일에 의욕을 보였다. 그는 자비를 들여서 외국 페스티벌도 많이 보고 왔다. 재즈 음악에 헌신하는 이 젊은이를 고맙게 생각한다.”
미국의 재즈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음악에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음악 그 자체다.” 인재진은 재즈라는 음악이 부황 끼가 든 사람들의 음악처럼 여겨지지만 생각 없이 들으면 썩 좋은 음악이라고 재즈를 추켜세운다. 이제야 인재진은 재즈의 추임새를 알게 되었다. 영어로 “재즈에 흥분한다”는 말을 ‘재즈 잇 업!(jazz it up!)’이라고 한다. 인재진은 2003년 가을에 한국 최초의 재즈 만화를 자기 공연기획사인 ‘앰프’의 이름으로 발간한다. 재즈비평가인 남무성의 글과 그림으로 꾸민 재즈 만화의 이름이 ‘재즈 잇 업!’이다. 일본 재즈 전문지인 ‘스윙저널’은 ‘만화로 보는 재즈 역사 100년’이라는 부제를 단 이 만화책이 대중적 재미가 있다고 평가하여 2005년 1월에 번역해서 연재했다.
인재진은 상명대학교 뉴미디어대학원 뮤직테크놀러지과에서 수제자 한 사람을 앞에 놓고 4학기 째 강의하고 있다. 타악기 연주자로 공연기획을 지망하는 박창호 군의 말이다.
“제가 아는 교수님은 다방면에 해박하고 예술인이 처한 상황을 잘 아십니다. 강의할 때 이론은 이런데 실제는 이렇다고 접목을 잘해주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흥행사 헹크의 덕담
제3자가 말하는 인물평은 한 인물을 아는데 일정한 자료를 제공한다. 호주의 음악순회연주 전문기획사인 ‘오스트레일리어-북유럽 연결망’ 대표인 헹크 반 리우윈이 이-메일 통신으로 대답한 인재진의 인물평은 덕담 일색이다. 헹크는 인재진을 이름 두 문자에 따라서 JJ라고 호칭한다.
“지난 6년 동안 JJ와 친교를 맺어왔다. 나는 1999년에 수준 높은 북유럽 전문 재즈 연주자를 서울에 소개할 능력이 있는 한국의 음악기획자를 찾으려고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 문의한 끝에 6명의 후보 명단을 받았다. 그 가운데 JJ는 유럽 재즈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엘지아트센터에서 연주회를 조직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JJ의 원활한 중계에 따라 나는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호주의 재즈 아티스트를 정기적으로 서울에 초청했다. JJ는 잘 웃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한국이 아시아의 재즈 문화 중심이 될 잠재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JJ가 한국 재즈기획의 개척자로서 국제적 안목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구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인재진은 2001년 11월에 호주에서 열린 국제재즈산업포럼(International Jazz Industry Forum)에 진출하는 기회를 잡는다.
당시 인재진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재즈의 현황과 재즈를 통한 국제적 네트워크의 조직 가능성 등을 주제로 발표하여 참석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만나 친교를 맺은 사람이 핀란드 포리재즈페스티벌(Pori Jazz Festival)의 예술감독 유리키 캉가스이다.
그의 초청으로 포리페스티발을 참관한 인재진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재즈는 이미 미국에서 유럽으로 움직였으며 이제 아시아로 몰려올 것이 예상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2005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재즈페스티벌협회(AJFO)’ 창립대회에서 인재진은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아시아 재즈 시대의 연결고리를 확보했다.
사과를 수확하던 2005년 10월 하순, 직사각형으로 산뜻하게 리모델링을 한 옛 가평읍 사무소 건물은 ‘자라섬 재즈 센터’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물론 대표는 인재진이다. 그는 어이가 없는 척 말한다. “어울리지 않지요. 가평 한가운데 재즈 센터가 서다니 우습지요.”
가평을 음악으로 경영하여 소 도읍의 문화 상징성을 특화한다는 것이 그 설립 의도이다. 물론 이 센터는 지역주민을 위한 생활 친화적 문화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인재진은 한겨레 문화기획학교의 ‘성공전략 캠프’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수강생 중에 가평군 문화관광과 직원이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재즈페스티벌은 초안이 잡혔다. 재즈에 무지했던 가평군은 담당 공무원 몇 사람의 노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재즈에 흥미를 갖게된다. 음악과 자연이 조화하고 레포츠와 휴식이 함께 하는 축제로 꾸민다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은 문화예술에 바탕을 둔 관광산업 진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2006년 늦여름 제2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 성황을 이루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재즈 페스티벌로 정착시킬 기대로 가평군청 전체 분위기는 말 그대로 재즈에 미칠 지경이 되었다.
문화기획학교에 출강할 때 한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공연기획이 재미있으세요?”
“난 너무 즐겁다. 1991년도에 처음 재즈를 시작할 때도 이 쪽에 덤비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도 사람이 없다. 튀려면 라이벌이 있거나 위아래로 10년 동안 사람이 없거나 두 가지다. 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남들이 양아치라고 건달이라고 그래도 꾹 참고 일했다. 돈에 욕심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업이다.”
인재진은
1965년 충남 당진 생. 고대 영문학과 졸. 음악관련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주)어드밴스드 뮤직 프러덕션(amp) 대표, 자라섬국제페스티벌(경기도 가평) 총감독,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겸임교수. 약 1100회의 재즈, 월드 뮤직 공연 제작. 재즈 인 마르시악(프랑스), 포리재즈페스티벌(핀란드), 페낭재즈페스티벌(말레지아), 왕가라타재즈페스티벌(호주) 등 유명 페스티벌에 인터내셔널 게스트 참가. 2004년과 2005년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개막을 주관하여 국제적인 재즈페스티벌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함.
안병찬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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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화는 개인이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와 교류하고 거래하는 비중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있다. 진정한 세계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와 교역기회에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이 앞서 국제적인 문제에 참여하고 교류의 실크로드를 새로 만들어낸다.
한 개인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며, 자신이 머물게 된 작은 지방에서 전 세계를 초청하여 만나려는 당돌한 사고는 진정으로 글로벌하다. 자신이 공연기획자로서 관계를 맺어온 세계의 재즈아티스트를 동원하고 가평이라는 작은 지자체를 설득하여 국제적인 재즈페스티발을 만들어간 인재진의 사례가 그렇다. 바로 옆 도시 춘천에서 15년에 걸쳐 일개 마임 예술가와 소수의 민간인들에 의해 국제마임축제의 아시아본산이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세계를 만나는 쾌감은 확실히 미래적이다.
‘재즈 사과’를 따다
그가 새로이 사과나무 과수원 주인이 된 것은 2005년 정월이다. 무모하게도 경기도 가평군 개곡리 산자락에 있는 지목 3000평의 사과 과수원을 3년 동안 임대한 것이다. 당초에 재즈음악을 틀어서 470그루의 사과나무를 재배하겠다는 유별스러운 계획을 세웠으나 첫 해에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사과를 수확하겠다는 엉뚱한 발상은 그다운 몽상과 심모원려에서 나왔다. 그는 땅 밑을 관통하는 지하수의 자양분을 믿어보기로 했다. “한 그루의 과수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은 꽃병에 꽂힌 절지가 아닌 바에야 지하수의 자양에 힘입은 까닭이 아닌가.” 바람이 찬 이른봄부터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과수원에 나가 힘겨운 노동을 했다. 요즘 농촌에는 돈을 준대도 일할 사람이 없어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한다. 가지치기를 한 자리들을 일일이 골라 붓으로 항균제를 바르고 농약은 열네 번 쳐야하는 것을 여섯 번 뿌렸다. 사과 꽃이 활짝 피자 벌들이 윙윙거리며 꽃가루를 옮겨 수정을 도왔다. 막 사과 열매가 달리던 5월에는 난데없이 우박이 쏟아져서 많은 열매를 곰보로 만들어버렸다. 마침내 가을이 되어 자양분과 광합성의 결실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2005년 첫 해에 그는 여름 사과인 아오리종 30상자와 가을 사과인 부사종 300상자를 수확했다. 사과 이름은 ‘자라섬 재즈 사과.’
그에게 과수원 길은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는 목가적인 과수원 길이 아니다. 그는 국제음악인 재즈를 가평의 자라섬에 토착시키려면 먼저 스스로를 토착화시켜야 한다는 꿍꿍이속으로 현지 사과를 재배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왜 그는 세계화한 재즈 음악을 메트로폴리탄이 아닌 일개 향촌에 심고자 하는가.
세상을 거꾸로 가면서 앞길을 개성적으로 좇는 즉흥적인 몽상가. 세계화한 재즈를 향토화한 재즈로 치환하려는 총알 탄 사나이. 국내에 한 사람뿐인 ‘재즈페스티벌기획자’. 인재진은 어떤 생각이 퍼뜩 나면 즉흥적으로 뛰어들고 보는 웃기는 사람이다.
‘지구’가 ‘자라섬’으로 오다
“‘글로벌’이 ‘로컬’로 온다”고 한다. 이것은 인재진이 구사하는 문화 기획전략의 핵심어이다. 그는 과수원 경영자를 포함해서 공연기획자·음반제작자·극장 경영자·해외공연 매니지먼트전문가·도서출판가·자라섬재즈페스티벌 예술총감독·대학 겸임교수 등 여덟 가지 직업을 겸임한 팔방미인(멀티태스커)이다.
그러나 그의 직업 브랜드는 ‘재즈축제기획자’이다. 국내에 한 사람뿐이고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재즈축제기획가, 유럽 재즈축제공연계에 이름이 알려진 한국의 재즈축제기획가. 그가 자기 전문 브랜드를 확고하게 굳히는 데 걸린 시간은 10년이다. 인재진이 비중 있는 외국 연주자 13개 그룹과 국내 연주자 17개 그룹을 초청하여 제1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연 것은 2004년이었다.‘ 축제기간 사흘 중에 첫날은 2만 명이나 되는 관객이 들어 쾌재를 불렀건만 남은 이틀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 그 탓에 축제의 성공예감은 날개를 접고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가평군의 지원금도 흡족하지 못한 터여서 몽상가 인재진은 ‘피를 많이 봤다.’ 1억 여 원의 개인 적자를 보았으나 넘어지고 일어서기에 이력이 난 그는 태연했다. 제2회 재즈 페스티벌에 기를 모으기 위해서 오히려 사과나무 과수원 주인이 되는 새 몽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취주악부에서 취미로 색소폰을 불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 초반에 그는 색다른 아이디어를 짜냈다. 결혼식장에서 축하연주를 하는 음악 용역사업이다. 아직 아무도 착안하지 않은 일이었다. 음악대학 아르바이트 지망자를 모아 현악 3중주단, 금관 5중주단, 목관 5중주단을 짜서 결혼식장에 출장을 보내 축하음악을 연주케 했다. 결혼 성수기인 10월에는 하루에 10여조의 연주단을 돌릴 정도로 성업이었다. 뒤이어 연주 영역을 장례식장으로 넓혀가다가 프로축구 개막식 등 각종 행사에 연주 인력을 공급하는 토털이벤트 서비스 사업으로 확장했다. 한 달에 1000만 원이 넘는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인재진은 음악연주 용역을 하는 3년 동안에 “음대생치고 나를 거쳐가지 않은 학생은 없었다”고 호언한다. 그가 재즈 음악의 명인인 강태환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강태환은 장르에 구애됨이 없이 뛰어난 음악성으로 독특한 동양적 감흥을 표현해 내는 세계적 자유음악 색소포니스트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래 인재진은 한쪽으로 벌고 한쪽으로 털어먹는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아이디어를 내서 돈도 잘 벌고 그 돈을 다른 아이디어를 실험하는데 써버린다. 그는 아주 즉흥적이고 무모하게 일을 꾸민다. 난데없이 중국 스촨성 성도인 청두(成都)의 ‘목각인형그림자극단’을 초청하여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손오공 대모험’을 한달 동안 공연하다가 크게 실패했다. 2억 원의 적자를 내고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인재진의 사람됨은 별난 데가 있다. 큰 적자를 보면서도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중국 극단 사람들과 신뢰관계를 유지하니, 김포공항을 출국할 때 23명의 단원들은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인재진의 생일이 오자 중국 청두에서 ‘엄청난 양의 선물’이 배달되었다. 그는 낮에는 코엑스 앞에서 어묵행상을 하고 밤에는 고속터미널 앞에서 자가용 영업을 하는 바닥 생활도 거쳤다. 홀연히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미국에서 무슨 지랄인가”하고 퍼뜩 정신이 들어 바로 짐을 싸들고 돌아온 사람이다. 접시 닦기질로 끝이 난 미국 생활 7개월이었다.
공연기획에 나선 인재진의 첫 실험장은 객석 100개의 ‘딸기극장’이다.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 월세 70만 원짜리 소극장을 대관해서 ‘딸기극장’이란 이름을 붙이고 재즈연주 공간으로 운영한 것은 1998년부터 2000년 1월까지이다. 그는 독특한 컨셉의 실험극장을 운영했다. 요일별로 유망한 아방가르드 중심의 아티스트를 초청하여 상설공연을 시행한 것이다.
“강태환 선생을 만나면서 재즈의 소명감이 생겼다. 그분은 대단한 세계적 연주자인데도 예술과 삶이 소박하여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이 일이 새로운 것이어서 애정이 생겼다.” 그가 재즈연주기획 방면에서 ‘무림의 고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은 것은 그때였다. 건물주가 바뀌어 문을 닫기까지 ‘딸기극장’은 쉬지 않고 공연하여 한국 재즈연주의 메카로 각인되었다.
재즈 추임새
강태환은 평한다. “인재진은 굉장히 어려운 가운데 소극장을 운영해서 좋은 연주자를 초청공연 하는 일에 의욕을 보였다. 그는 자비를 들여서 외국 페스티벌도 많이 보고 왔다. 재즈 음악에 헌신하는 이 젊은이를 고맙게 생각한다.”
미국의 재즈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음악에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음악 그 자체다.” 인재진은 재즈라는 음악이 부황 끼가 든 사람들의 음악처럼 여겨지지만 생각 없이 들으면 썩 좋은 음악이라고 재즈를 추켜세운다. 이제야 인재진은 재즈의 추임새를 알게 되었다. 영어로 “재즈에 흥분한다”는 말을 ‘재즈 잇 업!(jazz it up!)’이라고 한다. 인재진은 2003년 가을에 한국 최초의 재즈 만화를 자기 공연기획사인 ‘앰프’의 이름으로 발간한다. 재즈비평가인 남무성의 글과 그림으로 꾸민 재즈 만화의 이름이 ‘재즈 잇 업!’이다. 일본 재즈 전문지인 ‘스윙저널’은 ‘만화로 보는 재즈 역사 100년’이라는 부제를 단 이 만화책이 대중적 재미가 있다고 평가하여 2005년 1월에 번역해서 연재했다.
인재진은 상명대학교 뉴미디어대학원 뮤직테크놀러지과에서 수제자 한 사람을 앞에 놓고 4학기 째 강의하고 있다. 타악기 연주자로 공연기획을 지망하는 박창호 군의 말이다.
“제가 아는 교수님은 다방면에 해박하고 예술인이 처한 상황을 잘 아십니다. 강의할 때 이론은 이런데 실제는 이렇다고 접목을 잘해주어 쉽게 이해할 수 있지요.”
흥행사 헹크의 덕담
제3자가 말하는 인물평은 한 인물을 아는데 일정한 자료를 제공한다. 호주의 음악순회연주 전문기획사인 ‘오스트레일리어-북유럽 연결망’ 대표인 헹크 반 리우윈이 이-메일 통신으로 대답한 인재진의 인물평은 덕담 일색이다. 헹크는 인재진을 이름 두 문자에 따라서 JJ라고 호칭한다.
“지난 6년 동안 JJ와 친교를 맺어왔다. 나는 1999년에 수준 높은 북유럽 전문 재즈 연주자를 서울에 소개할 능력이 있는 한국의 음악기획자를 찾으려고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 문의한 끝에 6명의 후보 명단을 받았다. 그 가운데 JJ는 유럽 재즈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엘지아트센터에서 연주회를 조직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JJ의 원활한 중계에 따라 나는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호주의 재즈 아티스트를 정기적으로 서울에 초청했다. JJ는 잘 웃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한국이 아시아의 재즈 문화 중심이 될 잠재성이 있다고 믿고 있다. JJ가 한국 재즈기획의 개척자로서 국제적 안목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지구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인재진은 2001년 11월에 호주에서 열린 국제재즈산업포럼(International Jazz Industry Forum)에 진출하는 기회를 잡는다.
당시 인재진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재즈의 현황과 재즈를 통한 국제적 네트워크의 조직 가능성 등을 주제로 발표하여 참석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만나 친교를 맺은 사람이 핀란드 포리재즈페스티벌(Pori Jazz Festival)의 예술감독 유리키 캉가스이다.
그의 초청으로 포리페스티발을 참관한 인재진은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재즈는 이미 미국에서 유럽으로 움직였으며 이제 아시아로 몰려올 것이 예상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2005년 7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재즈페스티벌협회(AJFO)’ 창립대회에서 인재진은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아시아 재즈 시대의 연결고리를 확보했다.
사과를 수확하던 2005년 10월 하순, 직사각형으로 산뜻하게 리모델링을 한 옛 가평읍 사무소 건물은 ‘자라섬 재즈 센터’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물론 대표는 인재진이다. 그는 어이가 없는 척 말한다. “어울리지 않지요. 가평 한가운데 재즈 센터가 서다니 우습지요.”
가평을 음악으로 경영하여 소 도읍의 문화 상징성을 특화한다는 것이 그 설립 의도이다. 물론 이 센터는 지역주민을 위한 생활 친화적 문화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인재진은 한겨레 문화기획학교의 ‘성공전략 캠프’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수강생 중에 가평군 문화관광과 직원이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재즈페스티벌은 초안이 잡혔다. 재즈에 무지했던 가평군은 담당 공무원 몇 사람의 노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재즈에 흥미를 갖게된다. 음악과 자연이 조화하고 레포츠와 휴식이 함께 하는 축제로 꾸민다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은 문화예술에 바탕을 둔 관광산업 진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2006년 늦여름 제2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이 성황을 이루자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적인 재즈 페스티벌로 정착시킬 기대로 가평군청 전체 분위기는 말 그대로 재즈에 미칠 지경이 되었다.
문화기획학교에 출강할 때 한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공연기획이 재미있으세요?”
“난 너무 즐겁다. 1991년도에 처음 재즈를 시작할 때도 이 쪽에 덤비는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도 사람이 없다. 튀려면 라이벌이 있거나 위아래로 10년 동안 사람이 없거나 두 가지다. 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고 남들이 양아치라고 건달이라고 그래도 꾹 참고 일했다. 돈에 욕심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업이다.”
인재진은
1965년 충남 당진 생. 고대 영문학과 졸. 음악관련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주)어드밴스드 뮤직 프러덕션(amp) 대표, 자라섬국제페스티벌(경기도 가평) 총감독,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겸임교수. 약 1100회의 재즈, 월드 뮤직 공연 제작. 재즈 인 마르시악(프랑스), 포리재즈페스티벌(핀란드), 페낭재즈페스티벌(말레지아), 왕가라타재즈페스티벌(호주) 등 유명 페스티벌에 인터내셔널 게스트 참가. 2004년과 2005년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개막을 주관하여 국제적인 재즈페스티벌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함.
안병찬 본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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