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엄청나게 발전했죠. 처음에 회사가 세계자동차 10위 안에 들어야 한다며 ‘GT-10'을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죠. 물론 나도 그렇구요. 전에는 국내에서만 잘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다들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현대자동차 차체1부에 근무하는 천영길(40) 씨는 회사의 발전상을 실감한다. 비록 지난 98년에는 IMF에 이은 구조조정으로 큰 홍역을 앓기도 했지만 그룹 경영진이 바뀌면서 큰 변화가 계속 되었다.
천 씨도 큰 변화를 겪었다. 지난 1990년에 입사해서 차체3부에서 근무하던 중 98년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0년에 다시 복직하여 계속 현대자동차를 다니고 있다.
한번 직장을 잃어본 터라 지금 다니는 이 일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고 있다. 더구나 가정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가장의 몫을 다하느라 직장의 소중함을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된다.
확 달라진 회사에 깜짝 놀라
다시 회사에 출근해 보니 회사 분위기가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회사가 'GT-10'을 부르짖었을 때, 천 씨도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년.
현대자동차는 세계 7위의 자동차유수업체로 발전하였고, 이젠 ‘GT-5', 세계5위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작업자들이 전과는 달리 품질에 아주 신경을 쓰고 있더라고요. 회사 시스템도 그렇고”라며 천 씨는 현장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중국과 인도, 터키와 미국 등 해외공장도 생겼고 해외 판매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현대자동차의 성장이 눈부시다. 창사 이래 최대 매출과 흑자라는 기록은 7년 째 매년 갱신되고 품질 향상과 아울러 브랜드 이미지도 올라가 있다.
이제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현대자동차가 더욱 발전하여 평생직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여기까지 오는 그의 지난날은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소농의 아들에서 노동자로 변신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근처에서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 천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과 아버지 수발을 혼자서 해냈다. 2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2년간 농사를 짓다가 친구 이야기 한마디로 현대자동차에 입사원서를 내는 바람에 농군에서 노동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일단 다녀보고 마음에 들면 다니고, 아니면 그만 둘 생각”이었던 천 씨는 입사하고 나서 당시 한창 활발하던 노동조합 운동에 곧바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열심이던 노동조합활동이었지만 결혼을 한 후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꼈다.
살 집도 있어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잘 키워야 했다. 당장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아내 문난초(38) 씨와 함께 두 사람은 허리띠를 졸라 맸다. 천 씨는 아내의 알뜰함을 바탕으로 재테크에 눈을 돌렸다. 퇴직금 중도청산한 돈에다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합해서 주식에 투자를 한 결과 아파트 분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았다.
별 탈 없이 회사 다니고 아이들 잘 크는 것이 소망
천 씨는 “(현대자동차가) 평생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 갖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라며 “회사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은 종업원 누구나 다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불혹으로 접어든 그에게는 알뜰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연(5)과 아들 창희(4)의 존재가 제일 큰 희망이고 책임감이다.
세간에서는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연봉을 많이 받는다고 비난을 퍼붓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내 문 씨도 “그 연봉은 신랑이 늘 힘든 주야 맞교대근무와 잔업을 하고 휴일 특근까지 하면서 번 것인데 무조건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 참 억울해요”라며 장시간 근로라는 어려움이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가족의 행복이 회사 발전과 궤를 같이 하지만 늘어나는 해외공장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아직도 정리해고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는 천 씨에게는 회사가 다짐하는 고용안정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내 문 씨는 회사가 잘 되고 있어 고용불안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마다 되풀이하는 파업을 이제는 자제했으면 좋겠다”며 “갈등이 꼭 투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아이들이 보면 좋은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아서”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이제 이 부부의 희망은 하나다. 가족 간에, 동료 간에, 노사 간에, 나아가 사회 곳곳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10년 쯤 후에 못 가 본 여행을 애들 데리고 같이 가는게 이들의 소박한 꿈이다.
울산 송진휴 기자 jh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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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차체1부에 근무하는 천영길(40) 씨는 회사의 발전상을 실감한다. 비록 지난 98년에는 IMF에 이은 구조조정으로 큰 홍역을 앓기도 했지만 그룹 경영진이 바뀌면서 큰 변화가 계속 되었다.
천 씨도 큰 변화를 겪었다. 지난 1990년에 입사해서 차체3부에서 근무하던 중 98년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0년에 다시 복직하여 계속 현대자동차를 다니고 있다.
한번 직장을 잃어본 터라 지금 다니는 이 일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고 있다. 더구나 가정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가장의 몫을 다하느라 직장의 소중함을 더욱 많이 생각하게 된다.
확 달라진 회사에 깜짝 놀라
다시 회사에 출근해 보니 회사 분위기가 이전과 사뭇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회사가 'GT-10'을 부르짖었을 때, 천 씨도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년.
현대자동차는 세계 7위의 자동차유수업체로 발전하였고, 이젠 ‘GT-5', 세계5위로 도약을 꿈꾸고 있다. “작업자들이 전과는 달리 품질에 아주 신경을 쓰고 있더라고요. 회사 시스템도 그렇고”라며 천 씨는 현장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중국과 인도, 터키와 미국 등 해외공장도 생겼고 해외 판매도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현대자동차의 성장이 눈부시다. 창사 이래 최대 매출과 흑자라는 기록은 7년 째 매년 갱신되고 품질 향상과 아울러 브랜드 이미지도 올라가 있다.
이제는 가족의 미래를 위해 현대자동차가 더욱 발전하여 평생직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여기까지 오는 그의 지난날은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소농의 아들에서 노동자로 변신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근처에서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 천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일과 아버지 수발을 혼자서 해냈다. 2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2년간 농사를 짓다가 친구 이야기 한마디로 현대자동차에 입사원서를 내는 바람에 농군에서 노동자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일단 다녀보고 마음에 들면 다니고, 아니면 그만 둘 생각”이었던 천 씨는 입사하고 나서 당시 한창 활발하던 노동조합 운동에 곧바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열심이던 노동조합활동이었지만 결혼을 한 후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고 느꼈다.
살 집도 있어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잘 키워야 했다. 당장 집을 장만하기 위해 아내 문난초(38) 씨와 함께 두 사람은 허리띠를 졸라 맸다. 천 씨는 아내의 알뜰함을 바탕으로 재테크에 눈을 돌렸다. 퇴직금 중도청산한 돈에다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합해서 주식에 투자를 한 결과 아파트 분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았다.
별 탈 없이 회사 다니고 아이들 잘 크는 것이 소망
천 씨는 “(현대자동차가) 평생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 갖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라며 “회사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은 종업원 누구나 다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불혹으로 접어든 그에게는 알뜰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연(5)과 아들 창희(4)의 존재가 제일 큰 희망이고 책임감이다.
세간에서는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연봉을 많이 받는다고 비난을 퍼붓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내 문 씨도 “그 연봉은 신랑이 늘 힘든 주야 맞교대근무와 잔업을 하고 휴일 특근까지 하면서 번 것인데 무조건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 참 억울해요”라며 장시간 근로라는 어려움이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금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가족의 행복이 회사 발전과 궤를 같이 하지만 늘어나는 해외공장이 꼭 반갑지만은 않다. 아직도 정리해고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하는 천 씨에게는 회사가 다짐하는 고용안정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내 문 씨는 회사가 잘 되고 있어 고용불안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마다 되풀이하는 파업을 이제는 자제했으면 좋겠다”며 “갈등이 꼭 투쟁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아이들이 보면 좋은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아서”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이제 이 부부의 희망은 하나다. 가족 간에, 동료 간에, 노사 간에, 나아가 사회 곳곳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10년 쯤 후에 못 가 본 여행을 애들 데리고 같이 가는게 이들의 소박한 꿈이다.
울산 송진휴 기자 jh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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