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기사) “화목한 가정이 제일 큰 희망이더라”
울산 천영길씨 가족 … 가족과 같이 지내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해
지역내일
2006-01-10
(수정 2006-01-10 오전 7:22:04)
소농의 아들에서 노동자로 변신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근처에서 태어난 천영길(40)씨는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진 땅이 없어 문중 논 5마지기를 겨우 부쳤지만 탈곡기가 있어 탈곡한 대가로 받는 쌀이 있어 굶고 살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천 씨는 농사일과 아버지 수발을 혼자서 다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년간 농사를 짓다가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가 1990년 10월. 천 씨는 “처음엔 일단 다녀보고 마음에 들면 계속다니고 아니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며 차체 3부에 배치됐다.
막상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보니 노동조합에서 집회와 시위가 한창이었고 피 끓는 젊은이였던 천 씨는 곧바로 노동조합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었다.
다시 복직하고 나니 회사 발전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작은 불만들이 쌓여서 파업 등 큰 싸움이 매년 벌어졌다.
천 씨는 이러한 과정에 죽어라 참여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에는 결혼 때문에 한번 빼먹은 것 말고는 꼬박꼬박 참석할 정도였다.
이렇게 열심히 노동조합활동을 하던 중 1998년 IMF라는 태풍은 천 씨를 정리해고의 아픔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당시 한창 현장 활동에 열심이었던 터라 복직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미혼이라 생계걱정이 크게 없어 복직활동에 더 열심일 수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다가 2000년 3월 31일 천 씨는 소망하던 복직이 되어 승용1공장으로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제일 잘 한 선택, 결혼
2001년 7월 만난 부인 문난초(38) 씨는 “처음 봤을 때 ‘저 남자구나’라는 느낌이 왔어요”라며 천씨에게서 남자다움을 느꼈단다. 그리고 만난 지 석 달 뒤 결혼으로 이어졌다.
문 씨는 “신랑이 현대차 다닌다고 말은 들었지만 막상 노조활동 하는 것을 보고서는 많이 놀랐다”며 특히 울산의 문화가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녀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유대감이 아주 강해요”라며 울산 문화가 생경했다고 말한다.
결혼을 하고 나니 둘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살 집도 있어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잘 키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장 집을 살 준비를 해야 했다. “아내가 정말 알뜰합니다”라며 “그 덕으로 아파트 분양 받을 준비는 어느 정도 했지요”라고 말하는 천 씨는 평범한 노동자 가장의 모습 그대로다.
별 탈 없이 회사 다니고 아이들 잘 크는 것이 소망
천 씨는 “(현대자동차가) 평생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 갖고 있다”며 “회사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불혹으로 접어든 그에게는 알뜰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연(5)과 아들 창희(4)의 존재가 제일 큰 희망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가거나 여전히 자유롭고 싶지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잘 한 선택이 아내와의 결혼과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이다.
아내 문씨는 남편과 아이들 건강이 제일 큰 관심거리다. “주야교대근무 하면 아무래도 밤낮으로 생활이 자꾸 바뀌니까 남편이 많이 힘들어 해요”라며 남편 걱정을 하다가도 “피곤할 텐데도 아이들 챙기고 같이 놀아주는 것 보면 참 고맙다”고 칭찬한다.
아내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파업을 이제는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애초 의도는 순수했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좀 퇴색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10년 후에는 가족 여행 떠나고파
회사가 잘 되고 있어 고용불안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 씨는 현대자동차 사원들의 연봉이 높다고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한 마디로 그 연봉은 장시간 근로의 대가로, 주야 맞교대근무를 하면서 번 것이기에 단순히 액수가 많다고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대할 때는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제 이들 부부의 희망은 하나다. 가족과 동료, 그리고 노사 간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조그만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길 바라고, 당장은 큰 딸 수연이가 밥을 잘 먹어서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고 나면 10년 후에는 애들 데리고 못 가 본 여행을 가보고 싶은 것이 천씨 가족의 조그만 새해 소망이다.
울산 송진휴 기자 jhso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근처에서 태어난 천영길(40)씨는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진 땅이 없어 문중 논 5마지기를 겨우 부쳤지만 탈곡기가 있어 탈곡한 대가로 받는 쌀이 있어 굶고 살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천 씨는 농사일과 아버지 수발을 혼자서 다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년간 농사를 짓다가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가 1990년 10월. 천 씨는 “처음엔 일단 다녀보고 마음에 들면 계속다니고 아니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며 차체 3부에 배치됐다.
막상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보니 노동조합에서 집회와 시위가 한창이었고 피 끓는 젊은이였던 천 씨는 곧바로 노동조합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었다.
다시 복직하고 나니 회사 발전이 눈에 들어왔다
현장에서 작은 불만들이 쌓여서 파업 등 큰 싸움이 매년 벌어졌다.
천 씨는 이러한 과정에 죽어라 참여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에는 결혼 때문에 한번 빼먹은 것 말고는 꼬박꼬박 참석할 정도였다.
이렇게 열심히 노동조합활동을 하던 중 1998년 IMF라는 태풍은 천 씨를 정리해고의 아픔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당시 한창 현장 활동에 열심이었던 터라 복직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미혼이라 생계걱정이 크게 없어 복직활동에 더 열심일 수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러다가 2000년 3월 31일 천 씨는 소망하던 복직이 되어 승용1공장으로 다시 출근하게 되었다.
제일 잘 한 선택, 결혼
2001년 7월 만난 부인 문난초(38) 씨는 “처음 봤을 때 ‘저 남자구나’라는 느낌이 왔어요”라며 천씨에게서 남자다움을 느꼈단다. 그리고 만난 지 석 달 뒤 결혼으로 이어졌다.
문 씨는 “신랑이 현대차 다닌다고 말은 들었지만 막상 노조활동 하는 것을 보고서는 많이 놀랐다”며 특히 울산의 문화가 서울과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녀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유대감이 아주 강해요”라며 울산 문화가 생경했다고 말한다.
결혼을 하고 나니 둘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살 집도 있어야 하고 태어난 아이들도 잘 키워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장 집을 살 준비를 해야 했다. “아내가 정말 알뜰합니다”라며 “그 덕으로 아파트 분양 받을 준비는 어느 정도 했지요”라고 말하는 천 씨는 평범한 노동자 가장의 모습 그대로다.
별 탈 없이 회사 다니고 아이들 잘 크는 것이 소망
천 씨는 “(현대자동차가) 평생직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 갖고 있다”며 “회사가 잘 돼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날의 열정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불혹으로 접어든 그에게는 알뜰한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수연(5)과 아들 창희(4)의 존재가 제일 큰 희망이다.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가거나 여전히 자유롭고 싶지만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잘 한 선택이 아내와의 결혼과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이다.
아내 문씨는 남편과 아이들 건강이 제일 큰 관심거리다. “주야교대근무 하면 아무래도 밤낮으로 생활이 자꾸 바뀌니까 남편이 많이 힘들어 해요”라며 남편 걱정을 하다가도 “피곤할 텐데도 아이들 챙기고 같이 놀아주는 것 보면 참 고맙다”고 칭찬한다.
아내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해마다 되풀이하는 파업을 이제는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애초 의도는 순수했다는 건 알지만 지금은 좀 퇴색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안타까움을 전했다.
10년 후에는 가족 여행 떠나고파
회사가 잘 되고 있어 고용불안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 씨는 현대자동차 사원들의 연봉이 높다고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한 마디로 그 연봉은 장시간 근로의 대가로, 주야 맞교대근무를 하면서 번 것이기에 단순히 액수가 많다고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대할 때는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제 이들 부부의 희망은 하나다. 가족과 동료, 그리고 노사 간에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 나은 사회,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조그만 행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길 바라고, 당장은 큰 딸 수연이가 밥을 잘 먹어서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고 나면 10년 후에는 애들 데리고 못 가 본 여행을 가보고 싶은 것이 천씨 가족의 조그만 새해 소망이다.
울산 송진휴 기자 jhso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