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10. 보조국사 지눌과 승보종찰 송광사>송광사에는 왜 탑이 없을까
일체의 장식적 형식 거부한 선풍(禪風) … 중창불사로 제모습 잃어
지역내일
2001-02-02
(수정 2001-02-02 오후 4:21:02)
옛날 어느 스님이 송광사에 큰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고 있었다. 조계산 입구에서 시냇물
을 따라 올라가는데, 개울에 배춧잎이 하나 떠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스님이 ‘헛걸음이로다. 시주받은 배추도 아낄 줄 모르는 절에 무슨 큰스님이 있겠는가’ 하
고 걸음을 돌리려는데, 어린 사미승(沙彌僧) 하나가 뛰어 내려와서는 “스님, 떠내려가는 배
춧잎 하나를 못 보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의 준엄한 승풍(僧風)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절이 호위호식의 도구로 전락한 시대
불교교단의 3대 구성요소는 불(佛) 법(法) 승(僧)이다. 부처님과 경전, 스님 이 3가지 보물이
다 갖추어져야 절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3가지 보물 가운데 특히 한 가지가 강조되는 경우가 있으니, 곧 불보(佛寶)종찰 양
산 ‘통도사(通度寺)’와 법보(法寶)종찰 합천 ‘해인사(海印寺)’, 그리고 승보(僧寶)
종찰 순천 ‘송광사(松廣寺)’이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모셔왔다는 석가모니 정골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되어 있다 하여 ‘불보
(佛寶)종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보장되어 있어 ‘법보(法寶)종찰’이라
한다. 송광사를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하는 것은 무려 16명의 국사(國師)가 이
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송광사에 승보종찰의 터전을 닦은 이는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다. 지눌은 선암
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한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5)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 경이 지나
황해도 서흥(瑞興) 땅에서 태어났다.
때는 고려 중기,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하는가 하면 금(金)나라가 침입하는 등 내우
외환이 끊이지 않았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더욱이 태조 왕건이 불교를 국교로 삼은 후 불교는 궁정·
우상불교로 흘러 부패하고 있었다. 민가에 아들이 3명 있으면 그 중 1명은 출가가 허용되어 농·공·
병역을 피해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 호의호식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8세에 종휘(宗暉)선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눌은 스스로를 ‘목우자(牧牛子)’
라 불렀다. 지혜의 소, 즉 진심(眞心)을 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평창의 청
원사에서 머물던 그는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게 된다.
우리의 본성은 망령된 생각을 일으켜 관능적 생활에 빠진다. … 그러나 참된 우리의 본성은 세계의
갖가지 것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로우며 스스로 존재한다.
이 구절을 읽은 목우자의 놀라움과 기쁨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 뒤로 그의 생활은 더욱 근엄해졌고
깊은 산중의 고요함을 찾아 어떤 어려움도 견디게 된다.
“정법·수도불교로 돌아가자”
고려 명종 12년 목우자는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한다. 이 법회
는 고려 무신정권에 의해 강요된 일종의 불교계 자정대회 같은 것이었다.
참석한 불교 지도자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말법적 좌절파와 “지금부터라도 정치와 종교
를 분리, 불교계가 살아남을 길을 찾자”는 정종분라파로 양분되어 있었고, 법회는 결론을 못 내리
고 설왕설래를 거듭했다.
이런 와중에 홀연히 일어나 사자후를 토한 젊은 승려가 있었으니, 바로 훗날 보조국사의 지위에 오
른 목우자 지눌이었다.
여기서 목우자는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스님들과 ‘결사(結社)’를 약속한다. 이 약속은 나중에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로 발전하는데, 지눌은 이 결사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의 경지를 알고자 하거든 그 뜻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는 말이 있거늘 …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소행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빙자하여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風塵) 속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한들 무슨 덕이 있겠는가.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당시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우상 불교’에서
‘정법(正法)불교’로의 회복운동이었다. 또한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한 ‘형
식불교’에서 ‘수도(修道)불교’의 재건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초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
몇해 후 지눌은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봉 무주암(無住庵)으로 들어가 세속과 모든 인연
을 끊고 오로지 내관(內觀)에만 몰두했다. 여기서 그는 대혜선사(大慧禪師)의 어록을 만
난다. 그에게 큰 깨우침을 준 대혜선사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지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선은 사량분별
(思量分別)을 일삼는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혜의 눈이 열린 지눌은 그로부터 3년 후 조계산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
었다. 수많은 도반들이 그를 따랐고 세속의 명예와 처자를 버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과 같았
다.
지눌은 깨닫고 나서 그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
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이는 남
종선(南宗禪)의 입장에서 북종선(北宗禪)을 받아들이는 한편,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교종(敎宗)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중창불사로 승보종찰 면모 잃어
지눌이 일으킨 선풍(禪風)은 모든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거부했다. 이는 80여칸에 이르
는 송광사 경내에 탑이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같은 지눌의 사상은 편견과 분열로 지리멸렬되어 가던 고려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가 세상
을 떠난 뒤에도 송광사는 조선 초까지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 명실상부한 승보종찰로 자
리잡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송광사에서 이런 근엄한 선불교의 전통을 느끼기는 어렵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마
주한 선암사가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송광사는 거듭된 중창불사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송광사는 산지의 비탈을 이용한 두개의 큰 석축을 기준으로 맨 위쪽이 수선<修禪> 영역, 가운
데가 대웅전 영역, 아래쪽에 우화각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영역, 세 영역으로 나뉜다.
6·25로 중심부의 전각들이 불타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 앞마당에 있던 ‘법왕문
(法王門)’을 중심으로 50여동의 크고 작은 전각이 동심원을 그리듯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영역에 대웅보전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앞마당의 전각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고구려풍
의 거대한 대웅보전이 뒤편의 수선영역을 가로막으면서 승보종찰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건축과) 교수는 “교종에 기반한 선암사의 건물들이 오히려 토
속적이고 자유분방한 반면, 선종에 바탕을 둔 송광사의 건축이 더 기교적이고 형식적”이라고 꼬집
는다.
선암사가 한 세기 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현재의 송광사는 1980년대
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거대한 대웅전이 들어선 전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修禪>
을 따라 올라가는데, 개울에 배춧잎이 하나 떠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스님이 ‘헛걸음이로다. 시주받은 배추도 아낄 줄 모르는 절에 무슨 큰스님이 있겠는가’ 하
고 걸음을 돌리려는데, 어린 사미승(沙彌僧) 하나가 뛰어 내려와서는 “스님, 떠내려가는 배
춧잎 하나를 못 보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의 준엄한 승풍(僧風)을 말해주는 일화이다.
절이 호위호식의 도구로 전락한 시대
불교교단의 3대 구성요소는 불(佛) 법(法) 승(僧)이다. 부처님과 경전, 스님 이 3가지 보물이
다 갖추어져야 절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3가지 보물 가운데 특히 한 가지가 강조되는 경우가 있으니, 곧 불보(佛寶)종찰 양
산 ‘통도사(通度寺)’와 법보(法寶)종찰 합천 ‘해인사(海印寺)’, 그리고 승보(僧寶)
종찰 순천 ‘송광사(松廣寺)’이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모셔왔다는 석가모니 정골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되어 있다 하여 ‘불보
(佛寶)종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이 보장되어 있어 ‘법보(法寶)종찰’이라
한다. 송광사를 ‘승보종찰(僧寶宗刹)’이라 하는 것은 무려 16명의 국사(國師)가 이
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송광사에 승보종찰의 터전을 닦은 이는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다. 지눌은 선암
사에서 천태종을 개립한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5)이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 경이 지나
황해도 서흥(瑞興) 땅에서 태어났다.
때는 고려 중기,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하는가 하면 금(金)나라가 침입하는 등 내우
외환이 끊이지 않았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더욱이 태조 왕건이 불교를 국교로 삼은 후 불교는 궁정·
우상불교로 흘러 부패하고 있었다. 민가에 아들이 3명 있으면 그 중 1명은 출가가 허용되어 농·공·
병역을 피해 삭발하고 절에 들어가 호의호식하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8세에 종휘(宗暉)선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눌은 스스로를 ‘목우자(牧牛子)’
라 불렀다. 지혜의 소, 즉 진심(眞心)을 기르는 사람이란 뜻이다. 남쪽으로 내려와 평창의 청
원사에서 머물던 그는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게 된다.
우리의 본성은 망령된 생각을 일으켜 관능적 생활에 빠진다. … 그러나 참된 우리의 본성은 세계의
갖가지 것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로우며 스스로 존재한다.
이 구절을 읽은 목우자의 놀라움과 기쁨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 뒤로 그의 생활은 더욱 근엄해졌고
깊은 산중의 고요함을 찾아 어떤 어려움도 견디게 된다.
“정법·수도불교로 돌아가자”
고려 명종 12년 목우자는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한다. 이 법회
는 고려 무신정권에 의해 강요된 일종의 불교계 자정대회 같은 것이었다.
참석한 불교 지도자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말법적 좌절파와 “지금부터라도 정치와 종교
를 분리, 불교계가 살아남을 길을 찾자”는 정종분라파로 양분되어 있었고, 법회는 결론을 못 내리
고 설왕설래를 거듭했다.
이런 와중에 홀연히 일어나 사자후를 토한 젊은 승려가 있었으니, 바로 훗날 보조국사의 지위에 오
른 목우자 지눌이었다.
여기서 목우자는 몇몇 뜻을 같이 하는 스님들과 ‘결사(結社)’를 약속한다. 이 약속은 나중에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로 발전하는데, 지눌은 이 결사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의 경지를 알고자 하거든 그 뜻을 허공처럼 맑게 하라는 말이 있거늘 …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소행을 돌이켜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빙자하여 이양(利養)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風塵) 속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한들 무슨 덕이 있겠는가.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당시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우상 불교’에서
‘정법(正法)불교’로의 회복운동이었다. 또한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한 ‘형
식불교’에서 ‘수도(修道)불교’의 재건운동이기도 했다.
조선초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
몇해 후 지눌은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봉 무주암(無住庵)으로 들어가 세속과 모든 인연
을 끊고 오로지 내관(內觀)에만 몰두했다. 여기서 그는 대혜선사(大慧禪師)의 어록을 만
난다. 그에게 큰 깨우침을 준 대혜선사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지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 선은 사량분별
(思量分別)을 일삼는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혜의 눈이 열린 지눌은 그로부터 3년 후 조계산 송광사로 거처를 옮겼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
었다. 수많은 도반들이 그를 따랐고 세속의 명예와 처자를 버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과 같았
다.
지눌은 깨닫고 나서 그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
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이는 남
종선(南宗禪)의 입장에서 북종선(北宗禪)을 받아들이는 한편,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교종(敎宗)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중창불사로 승보종찰 면모 잃어
지눌이 일으킨 선풍(禪風)은 모든 장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거부했다. 이는 80여칸에 이르
는 송광사 경내에 탑이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같은 지눌의 사상은 편견과 분열로 지리멸렬되어 가던 고려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가 세상
을 떠난 뒤에도 송광사는 조선 초까지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 명실상부한 승보종찰로 자
리잡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송광사에서 이런 근엄한 선불교의 전통을 느끼기는 어렵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마
주한 선암사가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송광사는 거듭된 중창불사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송광사는 산지의 비탈을 이용한 두개의 큰 석축을 기준으로 맨 위쪽이 수선<修禪> 영역, 가운
데가 대웅전 영역, 아래쪽에 우화각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영역, 세 영역으로 나뉜다.
6·25로 중심부의 전각들이 불타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 앞마당에 있던 ‘법왕문
(法王門)’을 중심으로 50여동의 크고 작은 전각이 동심원을 그리듯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영역에 대웅보전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앞마당의 전각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고구려풍
의 거대한 대웅보전이 뒤편의 수선영역을 가로막으면서 승보종찰로서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건축과) 교수는 “교종에 기반한 선암사의 건물들이 오히려 토
속적이고 자유분방한 반면, 선종에 바탕을 둔 송광사의 건축이 더 기교적이고 형식적”이라고 꼬집
는다.
선암사가 한 세기 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현재의 송광사는 1980년대
의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거대한 대웅전이 들어선 전혀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修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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