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 점유율 68%·택시제도 도입 기여 … 버스 민영화 전담
‘초보 시장경제’사회에 고객감동 서비스와 마케팅 개념 도입
800년 전 몽골족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세계인구의 3분의2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스칸(1162~1227년)은 모든 점령지를 역참제로 연결했다. 점령지에 거미줄처럼 역을 두어 파발마가 칭기스칸의 명령을 전달하는 시간을 10분의 1로 단축했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송년특집호에서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했다는 것이 선정이유다.
칭기스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중국 중원에 궁궐을 짓고 비단옷을 입은 몽골족은 1368년 초원으로 밀려났다.
이후 몽골인 들은 중국에 수백 년간 지배당하고, 라마불교에 순치되고, 사회주의를 겪는 동안 질주본능을 억제 당했다. 정착문명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목민을 닫힌 공간에 가두어 놓았다.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1921년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몽골의 구 집권세력은 1990년 시장경제를 선택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600 달러에 못 미친다. 국토는 한반도의 7.4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인천광역시와 같은 규모인 271만 명이다.
몽골이 유목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 이미 전체인구의 절반이상이 도시에 모여 산다. 정착성과 유목성은 선택이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열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몽골은 사람들의 이동속도와 정보전달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바로 그 일을 한국기업, 한국인들이 주도 하고 있다.
몽골을 열린 세상으로
이끄는 한국기업·한국인
울란바타르와 21개 아이막(도)을 연결하는 행정·비상 디지털 통신망 구축(삼성물산), 울란바타르와 동부 4개 아이막에 광케이블 기간망 설치(대한전선), 몽골 제2휴대전화 사업(SK텔레콤 대한전선) 몽골통신에 40% 지분으로 경영 참여(KT) 등 한국기업들은 몽골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자동차는 몽골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인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내에 들어서면 유난히 한국 자동차가 많다. 특히 버스, 승합형마을버스, 택시는 온통 한국차다. 몽골의 자동차 보유대수 16만대 중에서 현대자동차가 60%인 9만6400대, 기아자동차가 7.9%인 1만2640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1997년 당시 러시아차 점유율이 87%, 현대차 6%, 기아차 0.3%였다. 8년 만에 믿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신화는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이를 그대로 실천한 몽골현대기아자동차 김태화(49) 사장이 있기에 가능했다.
몽골 정부는 지난 해 7월 정몽구 회장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울란바타르시는 2003년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김 사장에게 울란바타르 명예시민증을 주었다.
김태화 사장은 몽골에서 1000명에 가까운 고용창출을 하는 외국기업인 이상의 존재다. 그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책임정비를 통해 자동차를 대량 보급했고 택시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에 꼭 필요한 대중교통수단인 버스회사의 민영화를 떠맡아 몽골의 교통문화를 바꿔놓았다.
김 사장의 삶은 21세기형 노마드(유목민)의 전형이다. 그는 용산공고 자동차과를 졸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면 형제들이 학업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다. 1976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울산공장 품질보증부에서 일했다.
회사를 다니며 홍익대 무역학과를 졸업했고, 내친 김에 산업공학 석사까지 마쳤다. 1990년 소비자보호업무를 담당하는 과장에서 퇴직한 후 창원에서 7년 동안 출고사무소를 운영했다. 이 때 산업공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으로 임직원이 한꺼번에 퇴직을 하자 그는 출고사무소 영업권을 내놓았다. 그는 몽골 진출을 결심했다. 출고사무소 운영 시절 ‘줄친’ 이라는 몽골국영관광회사에 25인승 버스를 납품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몽골의 도로상태, 기후, 정비수준, 연료의 질 등을 연구한 후 차량을 개조해 납품함으로써 고객을 감동시켰다.
정몽구 회장 ‘현장경영’
도움으로 급성장
1997년 줄친의 사장은 그에게 몽골에서 정비공장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달러 환율 급상승 여파로 몽골에서도 한국 자동차 주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오래된 자동차는 잘 달리는데, 몇 년 안 된 자동차는 고장이 잦았다. 1993년부터 한국이 무연휘발유를 쓰며 자동차도 이에 맞춰서 나왔는데 몽골은 여전히 유연휘발유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무연차 900대를 모두 찾아서 공짜로 수리해 주었다. 본사를 설득해 정비인원을 지원 받았다. 몽골 신문 방송에서는 “현대가 중고차를 공짜로 수리해 준다”고 크게 보도했다.
아무리 낡은 차라도 현대에 가져가면 수리를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중고 현대자동차 수입이 급증했다. 97년 현대차 점유율이 6.2%였는데, 99년 31.3%로 치솟았다.
김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판단이 주효했다”고 공을 돌렸다. 99년 5월 몽골을 방문한 정 회장은 김 사장에게 “중고차 중심의 몽골시장에서 부품 갖고 장난치지 마라. 순정부품을 싸게 팔고 수리를 잘 해주어야 새 차 판매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몽골에는 부품을 싸게 공급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몽골에는 연간 500만 달러 규모의 현대·기아차 부품시장이 만들어졌다. 신차 시장도 해마다 20~30%씩 성장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자동차를 제외하면 현대·기아가 신차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몽골현대기아자동차의 올해 신차 판매목표는 500대다.
김 사장은 이미 만들어진 시장에서 물건을 잘 판 사람이 아니다. 지역실정에 맞는 시장을 먼저 만들고 물건을 파는 마케팅 전문가다. 1999년 신차를 팔 요량으로 몽골 정부에 택시 도입을 건의했다. 이때부터 현대·기아차 1500대를 택시용으로 팔았고, 요즘도 매년 100대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정비공장 동업을 정리하고, 몽골현대기아자동차를 설립했다. 독립법인의 사장이며 현대·기아자동차 몽골지사장이 된 것이다. 판매담당 김재수 이사, 정비·부품담당 엄정환 이사, 부품판매및 대형정비공장 담당 김종현 부장이 차례로 회사에 합류했다. 김재수 이사는 몽골여인과 결혼을 해 반은 몽골사람이 됐다.
70대 엄원섭 사장이
버스 민영화 주도
몽골 정부는 10년 의무교육을 시킨 유목민의 아들딸들을 정착도시로 끌어내고 있다. 캐시미어와 피혁, 고기가공 공장에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미 울란바타르(90만) 등 정착도시에 인구의 절반이상이 살고 있다.
한 달 6만~7만원을 받는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값싼 대중교통수단이 필요하다. 울란바타르에는 4개의 국영 버스회사가 있었다. 지난해 김 사장은 몽골의 시티택시회사, 서울의 한남운수와 합작으로 제2버스 회사를 인수했다. 올해는 제3버스 회사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울란바타르 버스 수송률의 75%를 책임지게 된다.
제2버스회사는 비효율의 전형이었다. 보유버스 170대 중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10여 대였다. 직원은 500명이고, 버스요금은 고작 200원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민영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김 사장 뿐이었다. 그는 엄정환 이사의 부친으로 서울경기양돈축협 조합장을 지낸 엄원섭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엄씨가 지난해 버스회사 사장에 취임할 때 나이가 71세다.
이들은 한국에서 차령 5년이 지난 버스를 들여와 자체 엔진보링공장에서 말끔히 정비를 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경비절감이 이루어졌다. 평균수명이 65세인 몽골사람들에게 70이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엄 사장은 경이적인 존재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 오늘도 2만 명의 몽골인이 무지개를 찾아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몽골방송에 출연한 김 사장은 “오래 전 나의 할아버지는 몽골사람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아 한반도로 갔다. 나는 반 몽골, 반 한국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몽골은 김 사장에게 또 하나의 솔롱고스다.
/울란바타르· 우믄고비= 글· 사진 신명식 기자
‘초보 시장경제’사회에 고객감동 서비스와 마케팅 개념 도입
800년 전 몽골족은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세계인구의 3분의2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스칸(1162~1227년)은 모든 점령지를 역참제로 연결했다. 점령지에 거미줄처럼 역을 두어 파발마가 칭기스칸의 명령을 전달하는 시간을 10분의 1로 단축했다.
1995년 워싱턴포스트는 송년특집호에서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인터넷보다 700년 앞서 전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했다는 것이 선정이유다.
칭기스칸은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중국 중원에 궁궐을 짓고 비단옷을 입은 몽골족은 1368년 초원으로 밀려났다.
이후 몽골인 들은 중국에 수백 년간 지배당하고, 라마불교에 순치되고, 사회주의를 겪는 동안 질주본능을 억제 당했다. 정착문명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목민을 닫힌 공간에 가두어 놓았다.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1921년 소련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몽골의 구 집권세력은 1990년 시장경제를 선택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600 달러에 못 미친다. 국토는 한반도의 7.4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인천광역시와 같은 규모인 271만 명이다.
몽골이 유목사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 이미 전체인구의 절반이상이 도시에 모여 산다. 정착성과 유목성은 선택이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열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몽골은 사람들의 이동속도와 정보전달 속도를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바로 그 일을 한국기업, 한국인들이 주도 하고 있다.
몽골을 열린 세상으로
이끄는 한국기업·한국인
울란바타르와 21개 아이막(도)을 연결하는 행정·비상 디지털 통신망 구축(삼성물산), 울란바타르와 동부 4개 아이막에 광케이블 기간망 설치(대한전선), 몽골 제2휴대전화 사업(SK텔레콤 대한전선) 몽골통신에 40% 지분으로 경영 참여(KT) 등 한국기업들은 몽골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자동차는 몽골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인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시내에 들어서면 유난히 한국 자동차가 많다. 특히 버스, 승합형마을버스, 택시는 온통 한국차다. 몽골의 자동차 보유대수 16만대 중에서 현대자동차가 60%인 9만6400대, 기아자동차가 7.9%인 1만2640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1997년 당시 러시아차 점유율이 87%, 현대차 6%, 기아차 0.3%였다. 8년 만에 믿기 어려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신화는 현대기아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과 이를 그대로 실천한 몽골현대기아자동차 김태화(49) 사장이 있기에 가능했다.
몽골 정부는 지난 해 7월 정몽구 회장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북극성 훈장’을 수여했다. 울란바타르시는 2003년 외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김 사장에게 울란바타르 명예시민증을 주었다.
김태화 사장은 몽골에서 1000명에 가까운 고용창출을 하는 외국기업인 이상의 존재다. 그는 고객을 감동시키는 책임정비를 통해 자동차를 대량 보급했고 택시제도를 도입했다. 산업화에 꼭 필요한 대중교통수단인 버스회사의 민영화를 떠맡아 몽골의 교통문화를 바꿔놓았다.
김 사장의 삶은 21세기형 노마드(유목민)의 전형이다. 그는 용산공고 자동차과를 졸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하면 형제들이 학업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집안이 어려웠다. 1976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울산공장 품질보증부에서 일했다.
회사를 다니며 홍익대 무역학과를 졸업했고, 내친 김에 산업공학 석사까지 마쳤다. 1990년 소비자보호업무를 담당하는 과장에서 퇴직한 후 창원에서 7년 동안 출고사무소를 운영했다. 이 때 산업공학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으로 임직원이 한꺼번에 퇴직을 하자 그는 출고사무소 영업권을 내놓았다. 그는 몽골 진출을 결심했다. 출고사무소 운영 시절 ‘줄친’ 이라는 몽골국영관광회사에 25인승 버스를 납품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몽골의 도로상태, 기후, 정비수준, 연료의 질 등을 연구한 후 차량을 개조해 납품함으로써 고객을 감동시켰다.
정몽구 회장 ‘현장경영’
도움으로 급성장
1997년 줄친의 사장은 그에게 몽골에서 정비공장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의 달러 환율 급상승 여파로 몽골에서도 한국 자동차 주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오래된 자동차는 잘 달리는데, 몇 년 안 된 자동차는 고장이 잦았다. 1993년부터 한국이 무연휘발유를 쓰며 자동차도 이에 맞춰서 나왔는데 몽골은 여전히 유연휘발유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무연차 900대를 모두 찾아서 공짜로 수리해 주었다. 본사를 설득해 정비인원을 지원 받았다. 몽골 신문 방송에서는 “현대가 중고차를 공짜로 수리해 준다”고 크게 보도했다.
아무리 낡은 차라도 현대에 가져가면 수리를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중고 현대자동차 수입이 급증했다. 97년 현대차 점유율이 6.2%였는데, 99년 31.3%로 치솟았다.
김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판단이 주효했다”고 공을 돌렸다. 99년 5월 몽골을 방문한 정 회장은 김 사장에게 “중고차 중심의 몽골시장에서 부품 갖고 장난치지 마라. 순정부품을 싸게 팔고 수리를 잘 해주어야 새 차 판매도 늘어난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몽골에는 부품을 싸게 공급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몽골에는 연간 500만 달러 규모의 현대·기아차 부품시장이 만들어졌다. 신차 시장도 해마다 20~30%씩 성장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무상으로 공급하는 자동차를 제외하면 현대·기아가 신차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몽골현대기아자동차의 올해 신차 판매목표는 500대다.
김 사장은 이미 만들어진 시장에서 물건을 잘 판 사람이 아니다. 지역실정에 맞는 시장을 먼저 만들고 물건을 파는 마케팅 전문가다. 1999년 신차를 팔 요량으로 몽골 정부에 택시 도입을 건의했다. 이때부터 현대·기아차 1500대를 택시용으로 팔았고, 요즘도 매년 100대를 공급하고 있다.
그는 정비공장 동업을 정리하고, 몽골현대기아자동차를 설립했다. 독립법인의 사장이며 현대·기아자동차 몽골지사장이 된 것이다. 판매담당 김재수 이사, 정비·부품담당 엄정환 이사, 부품판매및 대형정비공장 담당 김종현 부장이 차례로 회사에 합류했다. 김재수 이사는 몽골여인과 결혼을 해 반은 몽골사람이 됐다.
70대 엄원섭 사장이
버스 민영화 주도
몽골 정부는 10년 의무교육을 시킨 유목민의 아들딸들을 정착도시로 끌어내고 있다. 캐시미어와 피혁, 고기가공 공장에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 이미 울란바타르(90만) 등 정착도시에 인구의 절반이상이 살고 있다.
한 달 6만~7만원을 받는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값싼 대중교통수단이 필요하다. 울란바타르에는 4개의 국영 버스회사가 있었다. 지난해 김 사장은 몽골의 시티택시회사, 서울의 한남운수와 합작으로 제2버스 회사를 인수했다. 올해는 제3버스 회사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울란바타르 버스 수송률의 75%를 책임지게 된다.
제2버스회사는 비효율의 전형이었다. 보유버스 170대 중에서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10여 대였다. 직원은 500명이고, 버스요금은 고작 200원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민영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김 사장 뿐이었다. 그는 엄정환 이사의 부친으로 서울경기양돈축협 조합장을 지낸 엄원섭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엄씨가 지난해 버스회사 사장에 취임할 때 나이가 71세다.
이들은 한국에서 차령 5년이 지난 버스를 들여와 자체 엔진보링공장에서 말끔히 정비를 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경비절감이 이루어졌다. 평균수명이 65세인 몽골사람들에게 70이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엄 사장은 경이적인 존재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 오늘도 2만 명의 몽골인이 무지개를 찾아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몽골방송에 출연한 김 사장은 “오래 전 나의 할아버지는 몽골사람이었다. 날씨가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아 한반도로 갔다. 나는 반 몽골, 반 한국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몽골은 김 사장에게 또 하나의 솔롱고스다.
/울란바타르· 우믄고비= 글· 사진 신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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