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장 마생 지음, 양희영 옮김, 교양인, 2만9000원
근·현대 인류역사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정치적으로 절대군주제를 쓰러뜨리고 공화정의 신기원을 개척해 근대 국민국가의 길을 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봉건적 구질서를 해체하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근대 정신사상 세계의 이정표를 마련한 것도 프랑스 혁명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 대혁명은 오늘의 서구사회를 있게 한, 그리하여 현재의 인류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형성한 인류역사의 찬란한 금자탑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어떠한 혁명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민중의 피와 목숨을 요구하기도 하며, 선각자들의 위대한 고뇌와 선견지명이 혁명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천지가 개벽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기득권층과 중간계급의 동요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도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구세력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전개한 민중과 이들의 벗이 된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가하면, 구질서와 지배체제에 야합하고 변절하는 기회주의적 혁명세력은 필연적으로 분화과정을 거친다.
이 책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촉발된 대혁명의 기간 중 사실상 유일하게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유지하며 민중의 이익을 결사적으로 옹호한 혁명가이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의 재판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그의 민중사랑은 1789년 삼부회의 소집과 함께 제3신분의 대표로 의회에 진출해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삼부회→제헌의회→입법의회→국민공회 등을 거쳐 1893년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1894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과 5년의 세월동안 그는 의회안과 밖에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해 불꽃같이 살았다.
그는 의회에서 일관되게 민중의 위대성과 구체제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1790년 5월 18일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국왕은 결코 ‘국민의 대표’가 아니며, ‘국민의 의지를 집행할 국민의 대리인이자 피위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어떠한 권력도, 그것이 아무리 위엄 있는 것이라 해도 민중의 대표라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의회 내에서 수많은 개혁적 조치들도 제안하고 대다수가 부결됐지만 뚜렷한 족적도 수없이 남겼다.
성직자의 결혼을 허가하고, 구질서에서 무한정의 권한을 누리던 성직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성직자 민사기본법’을 제정했으며, 공명정대한 재판소의 조직과 함께 수없이 터져 나오는 혁명적 민중들의 각종 소요에 대한 옹호책을 제시했다.
특히 외국과의 전쟁에 대한 일관된 반대는 그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혁명의 초기 프랑스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사실상 그의 일관된 전쟁반대 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배세력은 끝내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폭등으로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앙양되었다.
이처럼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세력의 근거지인 루이 16세의 폐위와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요구했으며, 민중들은 1792년 8월 10일 왕이 살고 있는 튈르리 궁을 습격해 왕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1793년 6월 최초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 프랑스를 수립했다.
국민공회의 출범과 함께 의회는 상퀼로트(민중)의 요구사항을 받아 들이 수밖에 없었으며, 속속 관련 법률들이 제정됐다.
민중들의 합법적인 공포정치가 구세력을 엄습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들은 분파가 갈라지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통파(온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과격파라고 비난했으며, 에베르파(과격파)는 그를 온건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실권을 장악한 이후 끝내 이들 과거의 동지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으며, 혁명은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민공회 의원들은 정파를 막론하고 한데 뭉쳐 로베스피에르에게 어떠한 반론의 기회도 보장하지 않은 채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스러졌다.
비록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혁명적 지조와 민중에 대한 열정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살아났다.
그는 1790년 12월 5일 의회연설에서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이다. 민중을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는가. 부자들인가. 권력자들인가.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해 혁명의 주체가 민중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책은 로베스피에르의 생생한 연설과 문서가 되살아나 혁명의 한가운데로 이끄는 마력을 느끼게 할 것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근·현대 인류역사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다. 정치적으로 절대군주제를 쓰러뜨리고 공화정의 신기원을 개척해 근대 국민국가의 길을 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봉건적 구질서를 해체하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근대 정신사상 세계의 이정표를 마련한 것도 프랑스 혁명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 대혁명은 오늘의 서구사회를 있게 한, 그리하여 현재의 인류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형성한 인류역사의 찬란한 금자탑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어떠한 혁명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민중의 피와 목숨을 요구하기도 하며, 선각자들의 위대한 고뇌와 선견지명이 혁명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천지가 개벽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기득권층과 중간계급의 동요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도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구세력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전개한 민중과 이들의 벗이 된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가하면, 구질서와 지배체제에 야합하고 변절하는 기회주의적 혁명세력은 필연적으로 분화과정을 거친다.
이 책의 주인공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촉발된 대혁명의 기간 중 사실상 유일하게 혁명적 절개와 지조를 유지하며 민중의 이익을 결사적으로 옹호한 혁명가이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의 재판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그의 민중사랑은 1789년 삼부회의 소집과 함께 제3신분의 대표로 의회에 진출해 수도 파리에 입성하면서 찬란하게 꽃피우게 된다.
삼부회→제헌의회→입법의회→국민공회 등을 거쳐 1893년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1894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과 5년의 세월동안 그는 의회안과 밖에서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해 불꽃같이 살았다.
그는 의회에서 일관되게 민중의 위대성과 구체제의 죄악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1790년 5월 18일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의 발언을 통해 국왕은 결코 ‘국민의 대표’가 아니며, ‘국민의 의지를 집행할 국민의 대리인이자 피위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어떠한 권력도, 그것이 아무리 위엄 있는 것이라 해도 민중의 대표라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의회 내에서 수많은 개혁적 조치들도 제안하고 대다수가 부결됐지만 뚜렷한 족적도 수없이 남겼다.
성직자의 결혼을 허가하고, 구질서에서 무한정의 권한을 누리던 성직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성직자 민사기본법’을 제정했으며, 공명정대한 재판소의 조직과 함께 수없이 터져 나오는 혁명적 민중들의 각종 소요에 대한 옹호책을 제시했다.
특히 외국과의 전쟁에 대한 일관된 반대는 그의 선견지명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혁명의 초기 프랑스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사실상 그의 일관된 전쟁반대 정책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배세력은 끝내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로 인한 식량부족과 물가폭등으로 혁명의 분위기는 더욱 앙양되었다.
이처럼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세력의 근거지인 루이 16세의 폐위와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요구했으며, 민중들은 1792년 8월 10일 왕이 살고 있는 튈르리 궁을 습격해 왕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1793년 6월 최초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 프랑스를 수립했다.
국민공회의 출범과 함께 의회는 상퀼로트(민중)의 요구사항을 받아 들이 수밖에 없었으며, 속속 관련 법률들이 제정됐다.
민중들의 합법적인 공포정치가 구세력을 엄습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들은 분파가 갈라지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통파(온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과격파라고 비난했으며, 에베르파(과격파)는 그를 온건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실권을 장악한 이후 끝내 이들 과거의 동지들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으며, 혁명은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민공회 의원들은 정파를 막론하고 한데 뭉쳐 로베스피에르에게 어떠한 반론의 기회도 보장하지 않은 채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그를 체포했으며, 그는 다음날 단두대의 이슬로 스러졌다.
비록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의 혁명적 지조와 민중에 대한 열정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살아났다.
그는 1790년 12월 5일 의회연설에서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이다. 민중을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는가. 부자들인가. 권력자들인가.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말해 혁명의 주체가 민중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책은 로베스피에르의 생생한 연설과 문서가 되살아나 혁명의 한가운데로 이끄는 마력을 느끼게 할 것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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