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졸리 ‘검사’와 <파리 선언="">
한국 검찰이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8일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은 옛 안기부의 X파일에서 삼성으로부터 적게는 몇 백만 원 많게는 몇 천만 원의 “떡 값”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전 현직 검사 7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검찰 내부에 “삼성 장학생”이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는지 오래다. 금년 들어 검찰의 “기라성 같은” 전직 간부들이 삼상에 “영입”됐다. 삼성으로서는 검찰을 “잘 관리”해온 성공 사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검찰로서는 결코 자랑스러운 기록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떡 값”도 흔히 쓰는 용어로 “대가성”이 딸린 돈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떡값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떡 값“이 당장의 대가성이 없었는지는 모르나 불확정 미래의 ”호의“를 기대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선물(先物)대가성“이 내포된 선물(先物)성 뇌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아예 ”떡 값“을 받지 않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 한국처럼 대기업으로부터 ”떡 값“을 받는 검찰이 있는가.
요즘 한국 검찰을 보는 국민의 눈은 차갑다. 형식적 법률 논리를 내세워 도청 내용으로 드러난 불법 행위보다 도청의 불법성 자체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여기에도 삼성이 관련돼 있다. 검찰의 앞으로의 수사 과정을 국민이 주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 때 프랑스 검찰도 오늘의 한국 검찰과 비슷했다. 검찰은 거물 정치인이나 대기업이 관련된 사건을 국민들이 속 시원하게 처리해 주지 못했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았을 리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예심판사(역할은 검사) 에바 졸리였다. 1964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 오 페어(au pair)로 들어 왔다가 그 집 장남과의 결혼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에바는 주경야독으로 38세에 뒤늦게 판사가 되는데, 92년 파리 법원의 예심판사로 임명된 이후 정상급 정치인과 대재벌 회장이 연루된 대형 부패사건을 소신껏 처리해서 언론의 각광을 받는다..
에바 졸리를 스타로 만든 사건이 94년에 터진 국영 석유회사 엘프 스캔들이다. 37명의 프랑스 정계 재계 거물들이 연루된 대 사건이다. 7년 남짓 끈 사건에서 에바 졸리는 엘프 회장을 지낸 현직 철도공사 회장을 구속 기소한다. 미테랑 대통령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내고 헌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거물 정치인 롤랑 뒤마를 배임죄로 기소한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언론과 국민은 여성 예심판사(검사)의 용기에 격려를 보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보수 정치인과 재계는 그를 극도로 증오했다. 이 “불장난 하는” 예심판사가 어디까지 나라를 흔들어 놓을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했다. 에바 졸리는 상관의 눈치나 보고 우유부단한 동료 예심판사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용기 있는 <새 세대=""> 젊은 검찰이 에바 졸리와 호흡을 같이 했다. 80년대 이태리에 <마니 풀리테="">가 있었다면 90년대 프랑스에는 에바 졸리와 새 세대 검사(예심판사)들이 있었다.
에바 졸리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역 공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가 “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루머까지 퍼트렸다. 에바 졸리는 엘프 사건 자전적 저서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이="" 이런="" 세상인가="">(2003)에서 수사과정에 내부의 압력도 받았고 생명의 위협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외부의 압력과 정신적 고민에 지친 에바 졸리는 2001년 남편이 사망하자 마침내 예심판사 직을 사임하고 2002년 모국인 노르웨이로 돌아가 외무부의 반부패 분야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에바 졸리는 지금도 일반 프랑스인에게는 용감한 검찰의 상징이다. 그는 <국경 없는="" 검사="">기구를 조직하고 2003년 6월18일에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마니 풀리테="">의 디 피에트로 검사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검사 14명과 함께 반부패 투쟁을 위한 <파리 선언="">을 발표했다. <파리 선언="">은 특히 대형 부패 사건의 거물 범인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처벌면제 현상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처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의 엘리트로 법보다 더 힘이 세기 때문에 법 위에 살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처벌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이것은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경제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으며 엘리트들이 사실상 법을 위반하고도 처벌 면제의 보장을 받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파리 선언은 묻는다. 한국의 검찰에게 묻는 질문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부패를 범하고도 처벌을 면제 받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검찰의 몫이라는 것이 파리 선언의 요체다. 에바 졸리는 이 점에서 우리의 좋은 모범이었다.
장행훈 .파리>파리>마니>국경>우리가>마니>새>파리>
한국 검찰이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18일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은 옛 안기부의 X파일에서 삼성으로부터 적게는 몇 백만 원 많게는 몇 천만 원의 “떡 값”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전 현직 검사 7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검찰 내부에 “삼성 장학생”이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는지 오래다. 금년 들어 검찰의 “기라성 같은” 전직 간부들이 삼상에 “영입”됐다. 삼성으로서는 검찰을 “잘 관리”해온 성공 사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검찰로서는 결코 자랑스러운 기록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떡 값”도 흔히 쓰는 용어로 “대가성”이 딸린 돈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순수한 떡값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떡 값“이 당장의 대가성이 없었는지는 모르나 불확정 미래의 ”호의“를 기대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 ”선물(先物)대가성“이 내포된 선물(先物)성 뇌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아예 ”떡 값“을 받지 않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 한국처럼 대기업으로부터 ”떡 값“을 받는 검찰이 있는가.
요즘 한국 검찰을 보는 국민의 눈은 차갑다. 형식적 법률 논리를 내세워 도청 내용으로 드러난 불법 행위보다 도청의 불법성 자체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여기에도 삼성이 관련돼 있다. 검찰의 앞으로의 수사 과정을 국민이 주시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 때 프랑스 검찰도 오늘의 한국 검찰과 비슷했다. 검찰은 거물 정치인이나 대기업이 관련된 사건을 국민들이 속 시원하게 처리해 주지 못했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았을 리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 일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예심판사(역할은 검사) 에바 졸리였다. 1964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 오 페어(au pair)로 들어 왔다가 그 집 장남과의 결혼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에바는 주경야독으로 38세에 뒤늦게 판사가 되는데, 92년 파리 법원의 예심판사로 임명된 이후 정상급 정치인과 대재벌 회장이 연루된 대형 부패사건을 소신껏 처리해서 언론의 각광을 받는다..
에바 졸리를 스타로 만든 사건이 94년에 터진 국영 석유회사 엘프 스캔들이다. 37명의 프랑스 정계 재계 거물들이 연루된 대 사건이다. 7년 남짓 끈 사건에서 에바 졸리는 엘프 회장을 지낸 현직 철도공사 회장을 구속 기소한다. 미테랑 대통령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내고 헌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거물 정치인 롤랑 뒤마를 배임죄로 기소한다. 과거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언론과 국민은 여성 예심판사(검사)의 용기에 격려를 보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보수 정치인과 재계는 그를 극도로 증오했다. 이 “불장난 하는” 예심판사가 어디까지 나라를 흔들어 놓을지 모른다고 전전긍긍했다. 에바 졸리는 상관의 눈치나 보고 우유부단한 동료 예심판사들을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용기 있는 <새 세대=""> 젊은 검찰이 에바 졸리와 호흡을 같이 했다. 80년대 이태리에 <마니 풀리테="">가 있었다면 90년대 프랑스에는 에바 졸리와 새 세대 검사(예심판사)들이 있었다.
에바 졸리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역 공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가 “외국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루머까지 퍼트렸다. 에바 졸리는 엘프 사건 자전적 저서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이="" 이런="" 세상인가="">(2003)에서 수사과정에 내부의 압력도 받았고 생명의 위협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외부의 압력과 정신적 고민에 지친 에바 졸리는 2001년 남편이 사망하자 마침내 예심판사 직을 사임하고 2002년 모국인 노르웨이로 돌아가 외무부의 반부패 분야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에바 졸리는 지금도 일반 프랑스인에게는 용감한 검찰의 상징이다. 그는 <국경 없는="" 검사="">기구를 조직하고 2003년 6월18일에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마니 풀리테="">의 디 피에트로 검사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검사 14명과 함께 반부패 투쟁을 위한 <파리 선언="">을 발표했다. <파리 선언="">은 특히 대형 부패 사건의 거물 범인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처벌면제 현상을 강하게 규탄하고 있다. 처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의 엘리트로 법보다 더 힘이 세기 때문에 법 위에 살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도 처벌 받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이것은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경제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으며 엘리트들이 사실상 법을 위반하고도 처벌 면제의 보장을 받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파리 선언은 묻는다. 한국의 검찰에게 묻는 질문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부패를 범하고도 처벌을 면제 받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검찰의 몫이라는 것이 파리 선언의 요체다. 에바 졸리는 이 점에서 우리의 좋은 모범이었다.
장행훈 .파리>파리>마니>국경>우리가>마니>새>파리>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