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해에는 해방 후 60년 동안 ‘조선’을 조국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고 ‘하나의 조선’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중국 상해에는 수백 명의 조선 사람이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남았다.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이들의 운명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됐다.
당시 중국 정부는 양자강 이북의 조선 사람에게는 ‘중국’ 국적을 부여했다. 그러나 양자강 이남지역의 조선 사람에게는 ‘북한’ 국적이 주어졌다. 중국과 북한 당국이 이런 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사람은 ‘조선족’으로 불렸고, 북한 국적을 받은 사람은 ‘교민’이라 불렸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외국인’으로서 온갖 설움을 당했다.
현재 상해에는 4~5만 명의 조선족, 4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북한국적 교민’은 대부분 사망하고 생존자는 30여명뿐이다. 이들은 남북한 중국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다. 세 나라 모두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교민과 조선족의 차이는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할 때 드러난다. 조선족이 중국을 응원할 때 교민들은 한국 팀을 응원한다.
◆상해 임정, 인성학교에서 민족정신 교육=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협성리 1호.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이 자리에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 건물이 있었다. 인성학교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상해로 건너온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던 곳이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27일 설립된 상해 한인기독교 소학교를 계승한 것이다. 1917년 2월 정식초등학교로 출범했다. 여운홍 선우혁 이유필 등이 학교를 운영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임정이 운영하는 학교가 됐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났다. 상해에 남은 교민들은 인성학교를 지켰으나 1935년 11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인성학교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살아났다. 역사 국어 교과서는 북한에서 보내온 것을 사용했다. 교민들도 이 학교근처에 모여 살았다. 1970년대 이후 인성학교에 대한 북한의 지원이 거의 끊겼다. 이때부터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연변 조선족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1980년대 중반 학생이 단 2명이 남으며 인성학교는 폐교됐다.
◆“조국 자유방문이 마지막 꿈”= 현재 북한 영사관은 인성학교 출신들에 대한 교민관리를 거의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70이 넘은 한 할머니는 북한국적이 싫다며 공민증을 북한영사관에 반납했다. 아무런 신분증이 없으니 아무 곳도 오갈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몇 해 전부터는 대한민국 상해총영사관에서 고령의 교민들에게 명절 때 용돈을 보내고, 적십자사에는 달력을 보내주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들을 북한 주민으로 취급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방문할 수 없다. 생활기반이 상해에 있으니 ‘탈북자’가 될 수도 없다.
1943년생인 한영숙씨는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교민’이 됐다. 그녀는 인성학교에서 공부했고, 중국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아들도 인성학교에 보냈다.
한씨는 1988년 (주)대우의 도움으로 임시여권을 받아 조국에 왔다. 그녀는 관계당국을 찾아다니며 “선친 때부터 중국에 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북한 국적은 내 뜻이 아니다”라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에 사는 언니가 일찍이 한씨의 가호적을 만들어놓은 덕분에 1989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다섯 달 만에 주민등록은 취소됐다. 그녀는 1997년까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버티다 결국 중국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한국식당 코리아와 중국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한류 덕분으로 한국식당은 장사가 잘된다.
한씨는 “이미 80이 넘는 교민들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 생활기반이 상해에 있으니 영구귀국은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유로운 방문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에 인성학교 동창들이 있다는데 그들이 우리를 초청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한씨는 인성학교 옛터에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는 게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상해= 신명식 기자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중국 상해에는 수백 명의 조선 사람이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남았다. 1949년 국공내전이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이들의 운명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됐다.
당시 중국 정부는 양자강 이북의 조선 사람에게는 ‘중국’ 국적을 부여했다. 그러나 양자강 이남지역의 조선 사람에게는 ‘북한’ 국적이 주어졌다. 중국과 북한 당국이 이런 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사람은 ‘조선족’으로 불렸고, 북한 국적을 받은 사람은 ‘교민’이라 불렸다.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외국인’으로서 온갖 설움을 당했다.
현재 상해에는 4~5만 명의 조선족, 4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북한국적 교민’은 대부분 사망하고 생존자는 30여명뿐이다. 이들은 남북한 중국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다. 세 나라 모두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교민과 조선족의 차이는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할 때 드러난다. 조선족이 중국을 응원할 때 교민들은 한국 팀을 응원한다.
◆상해 임정, 인성학교에서 민족정신 교육= 상해시 노만구 마당로 협성리 1호.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이 자리에는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성학교’라고 불리는 학교 건물이 있었다. 인성학교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의 한을 안은 채 상해로 건너온 조선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던 곳이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27일 설립된 상해 한인기독교 소학교를 계승한 것이다. 1917년 2월 정식초등학교로 출범했다. 여운홍 선우혁 이유필 등이 학교를 운영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며 임정이 운영하는 학교가 됐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났다. 상해에 남은 교민들은 인성학교를 지켰으나 1935년 11월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인성학교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살아났다. 역사 국어 교과서는 북한에서 보내온 것을 사용했다. 교민들도 이 학교근처에 모여 살았다. 1970년대 이후 인성학교에 대한 북한의 지원이 거의 끊겼다. 이때부터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고, 연변 조선족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1980년대 중반 학생이 단 2명이 남으며 인성학교는 폐교됐다.
◆“조국 자유방문이 마지막 꿈”= 현재 북한 영사관은 인성학교 출신들에 대한 교민관리를 거의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70이 넘은 한 할머니는 북한국적이 싫다며 공민증을 북한영사관에 반납했다. 아무런 신분증이 없으니 아무 곳도 오갈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몇 해 전부터는 대한민국 상해총영사관에서 고령의 교민들에게 명절 때 용돈을 보내고, 적십자사에는 달력을 보내주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들을 북한 주민으로 취급한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방문할 수 없다. 생활기반이 상해에 있으니 ‘탈북자’가 될 수도 없다.
1943년생인 한영숙씨는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교민’이 됐다. 그녀는 인성학교에서 공부했고, 중국인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아들도 인성학교에 보냈다.
한씨는 1988년 (주)대우의 도움으로 임시여권을 받아 조국에 왔다. 그녀는 관계당국을 찾아다니며 “선친 때부터 중국에 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얻은 북한 국적은 내 뜻이 아니다”라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에 사는 언니가 일찍이 한씨의 가호적을 만들어놓은 덕분에 1989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다섯 달 만에 주민등록은 취소됐다. 그녀는 1997년까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버티다 결국 중국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한국식당 코리아와 중국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한류 덕분으로 한국식당은 장사가 잘된다.
한씨는 “이미 80이 넘는 교민들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 생활기반이 상해에 있으니 영구귀국은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유로운 방문을 원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에 인성학교 동창들이 있다는데 그들이 우리를 초청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한씨는 인성학교 옛터에 기념비라도 하나 세우는 게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상해= 신명식 기자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