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기자 rhee@naeil.com
진로그룹의 분해비운도 따지고 보면 구조적 모순을 듬뿍안고 있는 한국경제와 매우 흡사했
다. 지나치게 차입에 의존했고 겁도 없이 단기자금을 끌어다 쓰는 '겁세포 마비'경영을 즐
겨 활용했다. 식품 유통 등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 경기퇴조 때 면역을 상실한 나머지 몰락
을 자초, 어찌보면 한국경제가 치욕적인 IMF체제를 맞이한 원인과 진배없었다.
지난97년7월 당시 30대재벌중 중위 서열의 진로그룹 부도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기아
그룹의 자금난 회오리에 직격탄을 맞았고 정계의 '세풍과 총풍사건 연계' 등 정치권의 큰손
(자금줄)으로 알려진 진로그룹 총수의 퇴진압력이나 비자금수사 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각에서 진로를 살릴수 있었는데 '인위적 해체론'을 주장, 그 진위
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진로보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그룹은 봐주면서 정치권에 적지않는
기여(?)를 한 진로를 보호해주지 않는 것은 모종의 계약이 깨졌기 때문이란 설이 끝임 없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재계 최고경영자나 당시 진로그룹 임원급들이 사석에서 진로그룹의 분
해를 놓고 간간이 정계거물급들을 들먹거리며 미세한 잡음도 일고 있다.
진로그룹은 정계의 입김(?)등으로 채권단의 거액지원 등 구제 특단조치에도 아랑곳없이 기
업의 사형선고인 부도를 낼 수밖에 없은 처지에 몰려야 했을까가 의문이다. 진로그룹은 한
보나 기아그룹과 달리 비교적 부동산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이 해체되는데는 정치적
온정의 손길이 끊어진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당시 채권단의 중책을 맡았던 모 인사의 증언. "진로그룹도 빚더미에 허덕인 무실덩어리 기
업체였어요. 그런데도 뭔지 모를 힘이 작용해 쓰러져가는 기업에 거액의 자금을 수혈시켰지
요. 허 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수백억원을 그냥 뿌린 겁니다. 대규모 자금이 계속투여 회생
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느닷없이 지원중단으로 바뀌는 듯 하더니 갑자기 부도 처
리됐어요. 그 처리과정이 아직도 의아해요."
그랬다. 진로를 살려야한다는 채권단의 강한 의지는 "아니다"로 돌변해 뚝심으로 버티던 장
진호 회장은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진로그룹의 분해도 다른 재벌그룹의 패망과정이 유사하다. 아낌없이 줄기차게 지원되던 자
금이 한순간에 뚝 끊겨진 것이다.
진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기업이다. 현대인의 링거인 소주를 만들어 부담없은 헐값
에 흠뻑 취하도록 환각의 기쁨을 만끽토록 했다. 진로는 1924년 고 우천(友泉) 장학엽 회장
에 의해 창업됐다. 브랜드 '두꺼비'를 착안해 소주의 대명사로 일궈놓았고 그 업적은 재벌
진로그룹을 탄생시켰다. 장회장의 사업영향은 그의 동생(장익용 서광그룹회장)이 섬유중견
그룹으로 성공하도록 하는 직.간접적인 모토가 되기도 했다. 진로그룹은 차남 진호씨가 회
장을 맡으면서 재벌그룹으로 위치를 굳혔지만 한편으로 오히려 그 허상으로 포장된 급성장
이 부실재무구조로 부도를 부채질 했다.
부도전 진로그룹은 진로쿠어스맥주, 진로종합유통 등 20여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렸다. 진로
의 비운은 당시 장회장의 왕성한 사업이 화근이 됐다. 서울 서초동 청주 의정부 등 지역에
대형 백화점을 잇따라 신축했다. 그러나 백화점 유통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디럭스하게 지
은 백화점은 이익은커녕 이자도 못낼만큼 경영상태가 취약했다. 게다가 주요 계열사 역시
대부문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나 식품 유통 등 부가가치가 비교적 높지않는 업종들로 포진되
어 있었다.
이같이 영양가 없는 계열사 늘리기 전략은 그룹의 좌초발단이 됐다. 지난97년8월 유통업체
인 청주백화점을 시발로 편의점업종인 진로베스토아가 부도로 쓰러졌다.이 회사의 부도금
은 고작 2억2900만원에 불과했다. 거대재벌이 단돈 몇천만원에 쓰러진 것도 미스터리이다.
당시 부채는 은행권 1조1790억원, 제2금융권이 2조2122억원 회사채 6786억원 등 총4조678
억원에 달했다. 예적금을 제외하면 순차입금은 2조6299억원. 어마어마한 부채를 어찌 해볼
묘책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진로그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에 착수한다. 있는대로 헐
값처분에 들어갔다. 12개계열사를 무더기로 팔기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부족 이었다.
관망하던 정부가 채권단에 칼자루를 넘겨주면서 진로그룹 처리를 종용한다. 강경식 재경원
장관겸 부총리가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을 긴급 찾아가 독대, 처리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결심을 했다. 설령 비자금 유입에 따른 정치권의 파장이 있다해도 무작정 무실기업 지원은
차후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을 같이했다. 정부를 이용해 단물을 빨아먹는 경영자를
퇴진시키고 그룹해체를 시장원리에 맡긴다는 의지가 채권단에 전달됐다. 부도유예협약이란
묘한 제도를 만들어 재벌해체를 유도했다. 경영권 확보를 전제로 부도유예협약→자구계획→
화의 (부도)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겉으로 살려주는 척하고 나중 경영자를 밀어내
는 전략이다. 정부와 채권단의 전략을 까마득히 모르고 지닌 장회장은 이 함정에 빠지고 말
았다. 경영권 보장을 해줄 것으로 알았던 부도유예협약은 오히려 부도를 부채질하는 제도였
다. 진로그룹 일부임원들이 나중 이사실을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진로그룹의 결정적인 비운은 자금운용의 미숙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나친 제2금융권의 의존
이다. 만기가 짧고 자금악화설이 돌기만 하면 만기이전에 어음이 교환에 돌려지는 제2금융
권의 돈을 겁도 없이 떠댔다. 96년말 기준으로 진로는 은행권이 6010억원, 제2금융권이 1조
3457억원, 회사채 6723억원 등 2조6190억원에 달했다. 회사채를 빼고도 은행권의 2배가 넘
는다. 이러니 지탱할 제간이 없었다. 돈이 팽팽 돌 것으로 믿고 마구잡이 끌어다 썼다. 자
금난을 견딜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인 셈이다.
진로그룹은 대부분의 계열사는 매각하고 최고경영자도 바뀌면서 주류 전문업종으로 거듭 태
어났다. 두꺼비 대신 참이슬 등 히트 소주를 쉼없이 쏟아내면서 해외시장에서도 인기를 얻
고 있을 정도로 '眞露(진로)'소주의 명성을 빛내고 있다.
진로그룹의 분해비운도 따지고 보면 구조적 모순을 듬뿍안고 있는 한국경제와 매우 흡사했
다. 지나치게 차입에 의존했고 겁도 없이 단기자금을 끌어다 쓰는 '겁세포 마비'경영을 즐
겨 활용했다. 식품 유통 등에 무리한 투자를 강행, 경기퇴조 때 면역을 상실한 나머지 몰락
을 자초, 어찌보면 한국경제가 치욕적인 IMF체제를 맞이한 원인과 진배없었다.
지난97년7월 당시 30대재벌중 중위 서열의 진로그룹 부도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기아
그룹의 자금난 회오리에 직격탄을 맞았고 정계의 '세풍과 총풍사건 연계' 등 정치권의 큰손
(자금줄)으로 알려진 진로그룹 총수의 퇴진압력이나 비자금수사 등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각에서 진로를 살릴수 있었는데 '인위적 해체론'을 주장, 그 진위
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진로보다 재무구조가 취약한 그룹은 봐주면서 정치권에 적지않는
기여(?)를 한 진로를 보호해주지 않는 것은 모종의 계약이 깨졌기 때문이란 설이 끝임 없이
제기되고 있어서다. 재계 최고경영자나 당시 진로그룹 임원급들이 사석에서 진로그룹의 분
해를 놓고 간간이 정계거물급들을 들먹거리며 미세한 잡음도 일고 있다.
진로그룹은 정계의 입김(?)등으로 채권단의 거액지원 등 구제 특단조치에도 아랑곳없이 기
업의 사형선고인 부도를 낼 수밖에 없은 처지에 몰려야 했을까가 의문이다. 진로그룹은 한
보나 기아그룹과 달리 비교적 부동산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이 해체되는데는 정치적
온정의 손길이 끊어진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당시 채권단의 중책을 맡았던 모 인사의 증언. "진로그룹도 빚더미에 허덕인 무실덩어리 기
업체였어요. 그런데도 뭔지 모를 힘이 작용해 쓰러져가는 기업에 거액의 자금을 수혈시켰지
요. 허 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수백억원을 그냥 뿌린 겁니다. 대규모 자금이 계속투여 회생
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느닷없이 지원중단으로 바뀌는 듯 하더니 갑자기 부도 처
리됐어요. 그 처리과정이 아직도 의아해요."
그랬다. 진로를 살려야한다는 채권단의 강한 의지는 "아니다"로 돌변해 뚝심으로 버티던 장
진호 회장은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진로그룹의 분해도 다른 재벌그룹의 패망과정이 유사하다. 아낌없이 줄기차게 지원되던 자
금이 한순간에 뚝 끊겨진 것이다.
진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기업이다. 현대인의 링거인 소주를 만들어 부담없은 헐값
에 흠뻑 취하도록 환각의 기쁨을 만끽토록 했다. 진로는 1924년 고 우천(友泉) 장학엽 회장
에 의해 창업됐다. 브랜드 '두꺼비'를 착안해 소주의 대명사로 일궈놓았고 그 업적은 재벌
진로그룹을 탄생시켰다. 장회장의 사업영향은 그의 동생(장익용 서광그룹회장)이 섬유중견
그룹으로 성공하도록 하는 직.간접적인 모토가 되기도 했다. 진로그룹은 차남 진호씨가 회
장을 맡으면서 재벌그룹으로 위치를 굳혔지만 한편으로 오히려 그 허상으로 포장된 급성장
이 부실재무구조로 부도를 부채질 했다.
부도전 진로그룹은 진로쿠어스맥주, 진로종합유통 등 20여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렸다. 진로
의 비운은 당시 장회장의 왕성한 사업이 화근이 됐다. 서울 서초동 청주 의정부 등 지역에
대형 백화점을 잇따라 신축했다. 그러나 백화점 유통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디럭스하게 지
은 백화점은 이익은커녕 이자도 못낼만큼 경영상태가 취약했다. 게다가 주요 계열사 역시
대부문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나 식품 유통 등 부가가치가 비교적 높지않는 업종들로 포진되
어 있었다.
이같이 영양가 없는 계열사 늘리기 전략은 그룹의 좌초발단이 됐다. 지난97년8월 유통업체
인 청주백화점을 시발로 편의점업종인 진로베스토아가 부도로 쓰러졌다.이 회사의 부도금
은 고작 2억2900만원에 불과했다. 거대재벌이 단돈 몇천만원에 쓰러진 것도 미스터리이다.
당시 부채는 은행권 1조1790억원, 제2금융권이 2조2122억원 회사채 6786억원 등 총4조678
억원에 달했다. 예적금을 제외하면 순차입금은 2조6299억원. 어마어마한 부채를 어찌 해볼
묘책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진로그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에 착수한다. 있는대로 헐
값처분에 들어갔다. 12개계열사를 무더기로 팔기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부족 이었다.
관망하던 정부가 채권단에 칼자루를 넘겨주면서 진로그룹 처리를 종용한다. 강경식 재경원
장관겸 부총리가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을 긴급 찾아가 독대, 처리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결심을 했다. 설령 비자금 유입에 따른 정치권의 파장이 있다해도 무작정 무실기업 지원은
차후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을 같이했다. 정부를 이용해 단물을 빨아먹는 경영자를
퇴진시키고 그룹해체를 시장원리에 맡긴다는 의지가 채권단에 전달됐다. 부도유예협약이란
묘한 제도를 만들어 재벌해체를 유도했다. 경영권 확보를 전제로 부도유예협약→자구계획→
화의 (부도)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겉으로 살려주는 척하고 나중 경영자를 밀어내
는 전략이다. 정부와 채권단의 전략을 까마득히 모르고 지닌 장회장은 이 함정에 빠지고 말
았다. 경영권 보장을 해줄 것으로 알았던 부도유예협약은 오히려 부도를 부채질하는 제도였
다. 진로그룹 일부임원들이 나중 이사실을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후문이다.
진로그룹의 결정적인 비운은 자금운용의 미숙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나친 제2금융권의 의존
이다. 만기가 짧고 자금악화설이 돌기만 하면 만기이전에 어음이 교환에 돌려지는 제2금융
권의 돈을 겁도 없이 떠댔다. 96년말 기준으로 진로는 은행권이 6010억원, 제2금융권이 1조
3457억원, 회사채 6723억원 등 2조6190억원에 달했다. 회사채를 빼고도 은행권의 2배가 넘
는다. 이러니 지탱할 제간이 없었다. 돈이 팽팽 돌 것으로 믿고 마구잡이 끌어다 썼다. 자
금난을 견딜 수 없는 결정적인 원인인 셈이다.
진로그룹은 대부분의 계열사는 매각하고 최고경영자도 바뀌면서 주류 전문업종으로 거듭 태
어났다. 두꺼비 대신 참이슬 등 히트 소주를 쉼없이 쏟아내면서 해외시장에서도 인기를 얻
고 있을 정도로 '眞露(진로)'소주의 명성을 빛내고 있다.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